“째려만 보고 욕만 해주면 된다며.” 민정이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진짜 그것만 하면 돼.” “이번이 마지막이다.” “알았어.” 아이들은 아카시아 껌 하나씩을 입에 물고 팔마재 쪽으로 걸었다. 풍선을 불고 껌으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누가 얼마나 크게 하는지를 가지고 시끄럽게들 떠들어댔다. 세나는 몇 번이나 풍선을 불었다 터뜨렸고, 아이들은 입술에 붙은 껌을 보고 깔깔거렸다.
팔마재 다리에 가까워지자 말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다리 위로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철판과 콘크리트가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다리 아래는 서늘했다. 커다란 기둥에는 색색의 락카와 페인트로 이름이며 욕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바닥에는 담배꽁초와 구겨진 과자봉지, 깨진 유리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햇빛이 도로가에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 아래까지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쟤네야.” 앞서 걷던 아이가 턱짓했다. 다리 기둥 너머에서 여자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한둘이 아니었다. 민정이가 걸음을 멈췄다. “야. 쟤네 왜 저렇게 많아?” “몰라. 지들도 몰려왔나 봐.” “원래 몇 명 온다고 했는데?” “두세 명?” “미쳤냐.” 반대편 아이들도 민정이 일행을 발견했다. 몇 명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한 아이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민정이 쪽을 빤히 바라봤다.
“쟤가 민정이야?” 누군가 말했다. 민정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아.” “몰라.” “아, 진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늦었다. 상대편 아이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불렀냐?” “그래.” “왜!” “몰라서 묻냐?” “모르는데.” 세나의 무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니네가 우리 꼰질렀잖아.” “어이없네. 누가 가출하래?” “뭐라고?” “지네가 잘못하고 어디서 행패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말이 오가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군가 욕을 했고, 반대편에서도 메아리처럼 욕이 돌아왔다. 민정이는 조금 떨어져 서서 아이들을 바라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 건지 모르겠고, 누구 말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말을 서로 되받아치며 목소리만 점점 커졌다.
“야, 그냥 가자.” 민정이가 세나에게 말했다. “잠깐만.” “뭘 잠깐만이야.” 그때 상대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무서우면 가든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정이가 고개를 돌렸다. “뭐?” “너 말이야. 쪼그만 게 왜 따라왔냐?” 민정이는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봤다. “다시 말해봐.” “쪼.그.맣.다.고.” 옆에 있던 아이들이 웃었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누가 먼저 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깨가 부딪히고 손이 올라갔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팔을 잡아챘고, 누군가는 머리채를 잡았다. 욕설과 비명이 다리 아래에서 한꺼번에 뒤엉켰다. “야! 놔!” “니가 먼저 잡았잖아!” “가만 안 둬.” 무스로 앞머리를 높이 세운 아이가 민정이에게 달려들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밀리다가 등이 다리 기둥에 부딪혔다. “뭐야. 별것도 아니네.” 옆에서 누군가 민정이의 팔을 잡아챘다. 뿌리치는 순간 다시 어깨를 떠밀렸다. 민정이가 휘청거렸다. 발끝에 뭔가 닿았다.
데구루루.
빈 콜라병 하나가 시멘트 바닥을 굴렀다. 머리 위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다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민정이는 몸을 숙여 콜라병을 집었다. 병 입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리 기둥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쨍그랑.
순간 다리 아래가 조용해졌다.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튀었다.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민정이도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는 콜라병의 목 부분만 남아 있었다. 깨진 유리 끝이 들쭉날쭉 뻗어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병목이 손안에서 미끄러웠다. 민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쳐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을 밀었던 아이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와 봐.” 아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민정이가 병을 휘둘렀다. “왜. 아까는 지랄하드만.” “야, 쟤 미쳤나 봐.” 아이들이 뒤로 물러섰다. “오라고!” “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한 아이가 뛰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뒤따라 달렸다. 운동화 소리가 다리 아래를 요란하게 울리다가 차츰 멀어졌다.
조금 지나자 민정과 세나 일행만 남았다. “와.”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민정이 돌았다.” “야, 미친!” “봤냐? 걔네 도망가는 거?” 아이들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민정이는 웃지 않았다.
손에 든 병을 내려다봤다. 깨진 유리 끝에 다리 밖의 햇빛이 걸렸다. 민정이의 손에 힘이 풀렸다. 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짤그랑. 아까와는 전혀 다른 작은 소리가 났다. “야, 가자.” 아이들이 먼저 다리 밖으로 걸어갔다.
“민정아!” 멀리서 세나가 불렀다. 민정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다리 밖은 눈이 부시게 밝았다. 민정이는 바닥의 깨진 병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아이들에게로 걸어갔다. 아카시아 껌은 언제부터였는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