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민정이는 영동 거리에 나가지 않았다. 말랭이 친구의 그 서늘한 일침 때문인지, 아니면 제 안에서 무너진 무언가 때문인지 민정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장지동 연립으로 돌아와 가방을 던져두었다. 방에 누워 천장의 무늬만 바라보다 잠이 들었고, 어둑해질 때야 겨우 눈을 떴다. 마당 구석에서는 여전히 흰둥이가 쇠사슬을 끄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가시덤불 같은 집이 힘겨워서 거리로 나갔을 텐데 요즘은 그것조차 귀찮았다. 그러다 어느 토요일. 숙모의 유난히 극성스러운 설거지 소리에 눈치가 보여 결국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찾은 롤라장 안은 여전히 시끄러운 음악이 쿵쾅거렸고, 형형색색의 조명이 천장을 빙글빙글 돌며 아이들의 얼굴을 번들거리게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지듯 링크를 스쳐 지나갔지만, 민정이는 도무지 그 틈에 끼어들 마음이 나지 않았다.
말랭이 친구는 예전보다 말이 줄었고, 다른 아이들도 각자 살아가기 바빴다. 민정이는 롤라장 입구의 차가운 난간에 기대어 사람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민정이?" 소음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또래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순간 민정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일국민학교를 나온 아이. 군산에서 유일한 사립이자, 노란 교복과 전용 스쿨버스로 유명했던 학교. 그 시절 군산의 아이들에게 제일국민학교는 다른 세상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서울로 과외를 다닌다는 소문이 돌던 아이들. 그 신세계에 있던 아이가 지금 민정이 앞에 서 있었다. "나 몰라?" 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같은 반이잖아." 그제야 이름이 떠올랐다. 세나였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늘 메이커 옷을 입고 다녔다.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던 기억이 스쳤다. "너 왜 여기 왜 왔냐?" 민정이가 퉁명스럽게 묻자, 세나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검은 권총 하나를 꺼냈다.
"이거 봐." 탕. 탕탕. 세나는 진지한 얼굴로 총 쏘는 시늉을 했다. 민정이는 어이가 없었다. "미쳤냐." "진짜 같지?" "장난감이잖아…" "아냐. 홍콩에서 들어온 거야." 세나는 신이 나 있었다. "주윤발이 쓰는 총이랑 똑같지?" 민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세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슬쩍 물었다. "너 샤크 짱이지?" "아냐. 우린 다 똑같아." "에이. 다 알어." "뭘." "맨날 몰려다니잖아." 세나는 부러운 얼굴이었다. "멋있어" 민정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살면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 아빠가 떠난 뒤로 누군가 자신을 부러워하거나 동경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뭐가 멋있어." "그냥." 세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 같잖아." "뭐가?" "너희들." "......" "영웅본색에 나오는 애들 같아."
민정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미쳤네." "진짜라니까." 세나는 진심이었다. "친구들끼리 맨날 몰려다니고." "......" "나도 그런 거 해보고 싶어." 민정이는 처음으로 세나를 자세히 바라봤다. TV 광고에서나 보던 카파 시계, 허리에 찬 소니 워크맨, 운동화와 양말에 새겨진 나이키 마크….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이는 아이였다. 그런데 정작 세나는 민정이 무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몰려다니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의리는 세우는 모습들이 홍콩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보였는지도 몰랐다. 세나는 쑥스럽게 말했다. "나도 좀 끼워주라." 민정이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애들이랑 안 다녀.” "왜?" 다들 바빠서.” 세나의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나랑 다니자.”
참 이상한 아이였다. 처음 보는 장난감 총을 자랑하고, 홍콩영화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쏟아내더니, 이제는 거리 아이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대책없는 순수함 때문에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몰랐다.
둘은 그날 롤라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영화 속 화려한 총격전과 오토바이 질주 장면들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정이는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조금 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아이와 영화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 마음 한구석이 덜 시렸다.
그날 밤은 장지동 연립 마당을 긁는 흰둥이의 쇠사슬 소리조차 평소보다 그리 크게 들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