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골목에는 밤늦게까지 습기가 떠돌았다. 민정이는 화장대 서랍에서 꺼낸 지폐를 주머니 안에 구겨 넣은 채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숙모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막내 삼촌은 술기운 섞인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민정이는 주머니 속 지폐를 몇 번이고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낯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물을 것 같았다. 너 돈 훔쳤지?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롤라장 앞에는 샤크 아이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예전보다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야.” 민정이가 다가가자 말랭이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때는 매일 붙어 다니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생활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때 친구 하나가 배를 문질렀다. “배고프다.” “왜?” “집에 밥이 없데.”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옆에 있던 아이도 툭 내뱉었다. “우리 집도 라면 먹어야 돼.” “라면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아이들이 시시하게 웃었다. 민정이는 말없이 주머니 속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돈의 감촉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망설여지지 않았다. “가자.” “어디?” “돈가스 먹으러.”, “뭐?” “내가 사주께.” 아이들은 잠시 민정이를 바라보다가 우르르 따라나섰다.
민정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드리 백화점 지하 매장으로 내려갔다. 사방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음식 코너에서 양배추 샐러드가 곁들여진 돈가스를 주문했다. 넓적한 고기 위에 듬뿍 뿌려진 달콤한 소스. 아이들은 말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댔다. 그 모습이 괜히 민정이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자 양말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히포, 프로스펙스, 나이키 양말이 최고의 유행이었다. 바지 밑단 아래로 살짝 보이는 브랜드 마크 하나에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던 시절이었다.
“야, 이거 비싸서 못 사겠다.” 친구 하나가 진열대를 만지며 말했다. 민정이는 대답 대신 점원에게 양말을 집어 건넸다. “이거 주세요.” “야, 진짜?” 아이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민정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조화당에서는 고로케빵과 슈크림빵을 한가득 샀다. 달콤한 냄새가 종이봉투 밖으로 흘러나왔다. “야, 민정이 돈 진짜 많네.” “부럽다.” “돈은 어디서 났어?” 순간 민정이가 움찔했다. “그냥 삼촌이.” 아이들은 더 묻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민정이는 혼자 계단 난간에 앉아 있었다. 조화당 빵 봉지가 발치에서 굴러다녔다.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우유 배달을 준비하러 갔고, 동생 밥을 챙기러 갔다. 결국 다시 혼자였다. 민정이는 남은 지폐를 꺼내 한참을 바라봤다. 죄책감이 들 줄 알았다. 엄마 얼굴이 떠오를 줄 알았다. 누군가 알아채고 혼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멀리서 롤라장의 팝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영동 거리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민정이는 남은 지폐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민정이는 자신도 모르게 지폐를 더 꼭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