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가 불행한 인생의 서막을 전해들은 건 서울 이모네 집이었다. 엄마의 언니인 큰이모는 민정이를 자신의 세 딸들보다 더 살뜰히 챙겼다. “너는 나를 똑 닮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이모. 그 포근함에 취해 잠시 시름을 잊을 무렵, 막내 사촌 언니가 예고도 없이 날카로운 진실을 던졌다. “너희 아버지 돌아가실 것 같데.”
민정이는 하나님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아빠 목숨만 살려주시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러나 소녀의 가녀린 기도는 먹히질 않았고, 며칠 뒤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엄마는 동네가 떠나가라 통곡했다. 민정이는 어릴 때부터 세상 요란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조문객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민정이에게도 머물렀지만, 끝끝내 엄마처럼 하지 않았다. 울어버리면 정말로 아빠 없는 애가 될 것 같아서.
조회 시간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길어지던 순간, 엄마 친구의 아들과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함께 다가왔다. “너네 아빠 죽었지?” “아니!” “우리 엄마가 그랬어. 니네 아빠 돌아가셨다고.” “아니라고!!”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민정이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민정이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지친 두 아이가 “이상하다, 우리 엄마가 진짜라고 했는데…….”라며 수군대며 돌아선 뒤에도 꼿꼿이 서 있었다. 종이 울리고 나서야 등에 고인 식은땀이 느껴졌다.
그날 밤, 집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민정이는 몰래 신발장에 있는 아버지 구두를 꺼냈다. 뒤축의 가장자리가 비스듬히 닳아있었다. “신발 닳는 모양도 꼭 닮았다”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구두 속에 발을 넣어보았다. 안이 한참 비었다. 멍하니 있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니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몇 번이나 되뇌었다.
다음 날도 민정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학교에 갔다. 한 번씩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저 사춘기쯤으로만 여겼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선생님이 눈물을 보였지만, 민정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빠가 살아서 돌아올 리는 없었으니까.
가세가 기울자 집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민정이는 무섭고 외로웠지만,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붙잡으면 버려질 테니까, 기대면 넘어질 테니까. 민정이는 먼저 손을 놓는 법을 익혔다. 상대가 거절해서 받을 상처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민정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홀로 서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고되고 시린 시절을 버티기 위한 아이의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