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7] 두 개의 불빛
상태바
[장지동 연립 3부: 민정이의 세계 #17] 두 개의 불빛
  • 김규아
  • 승인 2026.07.03 04:47
  • 기사수정 2026-07-03 04: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정이는 자이언트 롤라장 앞에서 세나를 또다시 만났다. 둘은 영화시장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고, 이성당에서 밀크쉐이크를 마시며 빨대로 거품을 후후 불었다. 영동 거리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양키시장과 유흥가, 좌판이 늘어선 시장이 있었고, 왼쪽엔 이성당과 영화시장, 국도극장이 있었다. 민정이는 세나를 만나고 그 왼쪽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성당 너머, 높은 담이 둘러진 단독주택들 사이에 세나네 집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잠시 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대문과 현관 사이 작은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다. 잉어 몇 마리가 햇빛을 받아 천천히 몸을 뒤집었다. "들어와." 세나가 손을 잡아끌었다.

현관에 들어선 민정이는 걸음을 멈췄다. 거실 천장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유리 장식마다 걸려있는 햇살. 바람이 스치자 반짝이는 빛들이 천장과 벽으로 흩어졌다. 민정이는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불빛 하나가 떠올랐다.

얇은 판자벽 사이에 매달려 있던 형광등이었다. 불이 한 번 깜빡이면 이쪽 방도, 저쪽 방도 함께 어두워졌다가 다시 함께 밝아지던 불빛. 쉰 밥을 먹으면서도 끊이지 않던 웃음도 함께 선명해졌다.

"야!" 세나가 손짓했다. "이거 봐." 비디오테이프가 플레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잠시 뒤 화면이 켜졌다. 민정이는 말로만 듣던 비디오 플레이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빠가 사줬어. 내가 홍콩 영화 좋아한다고.” 총성이 울렸다. 주윤발이 양손에 권총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났다.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샹들리에의 유리 조각들이 스크린에서 튀는 파편처럼 함께 반짝였다.

"멋있지?" 세나의 눈도 함께 반짝댔다. "탕!" "탕탕!" 세나는 장난감 권총을 들고 화면을 따라 했다. 민정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시민회관 뒤 공사장은 저렇지 않았다. 거기에는 음악도, 조명도 없었다. 거친 숨소리만 울러 퍼졌다. 욕설, 신음, 어둠…. 진흙 속에 처박힌 운동화 한 짝. 그 장면에는, 멋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너 그때 진짜 무서웠어?" 세나는 화면을 보며 물었다. "애들이 그러던데. 니가 영화 주인공처럼 막아섰다고" 잠시 뒤, 혼자 읊조렸다. "나도 그런 거 해보고 싶다."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섭긴 하겠지만." 세나는 다시 웃었다. "그래도 멋있잖아." 무서울 때는, 멋있다는 생각이 들 틈조차 없는데…. 민정이는 속으로 되뇌었다.

"너희는 왜 맨날 같이 다녀? 좋아서?." 민정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세나가 사랑하는 영화가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냥." 민정이는 그 말만 돌려주었다. “해봐.” 세나가 장난감 권총을 민정이 손에 쥐여주었다. 까만 플라스틱은 차갑고 가벼웠다. “너도 주윤발처럼 해봐. 어울릴 거 같아.” 민정이는 총을 들어 화면을 향해 겨눠보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가짜 총은 너무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낯설었다.

“……안 할래.” 민정이는 총을 슬쩍 내려놓았다. “왜? 재밌잖아.” “진짜가 아니잖아” 세나는 까르르 웃으며 다시 총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가짜지. 그래서 재밌는 거잖아.” 화면 속에서는 또 한 무리가 쓰러지고 있었다. 세나는 여전히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문득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새벽마다 우유를 돌리던 아이. 먹다 남은 빵을 봉지에 넣어 동생 몫을 남기던 아이. 거리보다 집이 더 무서워 밤을 걷던 아이. 그 아이들의 밤은 한 번도 영화였던 적이 없었다. 세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웃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비디오를 보다 민정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나가 대문까지 따라 나왔다. “내일도 올 거지?” 민정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세나가 아직도 대문에 매달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음에는 나도 너희랑 같이 다니고 싶어! 한 번이라도 껴줘!" 민정이는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등 뒤에서 철컥. 대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어둑해진 담장 너머 창문으로 샹들리에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잘게 부서진 빛들이 유리창에 흔들렸다. 민정이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자꾸 다른 불빛 하나가 떠올랐다. 얇은 판자벽 사이에 매달려 있던 형광등. 한 번 깜빡이면 이쪽 방도, 저쪽 방도 함께 어두워졌다가, 다시 함께 밝아지던 불빛….

민정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는 샹들리에가 반짝였고, 마음속에서는 형광등 하나가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