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거리의 밤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샤크 아이들이 매일같이 모이던 시민회관 공사판에도 빈자리가 하나둘 늘어갔다. 무서운 오빠들과의 맞닥뜨린 그날 이후,아이들은 조금씩 현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우유를 돌려야 하는 아이가 있었고, 신문을 배달하는 아이도 있었다. 시장 좌판을 돕는 친구도 있었고, 어린 동생을 업고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친구들끼리 어울려 서로에게 위로가 됐지만, 세상은 이들이 오래 아이로 남아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삶의 무게를 가족과 함께 짊어져야 하는 아이들. 민정이와 그들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민정이네 형편이 예전만 못했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리의 아이들은 배고팠고, 민정이는 텅 비어 있었다. 결핍의 모양이 서로 달랐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샤크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어딘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아이들은 하나둘 먼저 자리를 떴다. “야, 나 간다. 새벽에 우유 돌려야 돼.” “씨, 나는 내일 시장 가야 해.”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골목 아래로 사라졌다. 민정이는 계단 난간에 혼자 남았다. 축축한 밤공기 사이로 롤라장 음악 소리만 희미하게 흘러왔다. 문득, 갈 곳이 있다는 게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정이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 밤거리를 떠돌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장지동 연립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 다다르자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흰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낑낑거리며 민정이 다리에 몸을 비볐다. “조용히 해….” 민정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흰둥이 머리를 밀어냈다. 괜히 숙모가 나와 잔소리할까 신경 쓰였다. 그런데 신발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낯선 구두 한 켤레. 반짝거리도록 광을 낸 검은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민정이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문을 열자 된장찌개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훅 끼쳐왔다. 주방에 있던 숙모가 민정이를 힐끗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못마땅한 표정부터 지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왔어?” 사람이 오면 태도가 달라지는 숙모의 모습은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거실에는 막내 삼촌과 삼촌 친구가 앉아 있었다. 한때 민정이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머리를 짧게 밀고, 팔뚝에 호랑이 문신이 있던 종만이 삼촌. 몇 년 전만 해도 무등을 태워주고 과자도 후하게 사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종만이 삼촌은 예전과 달랐다. 번들거리는 양복에 짙은 담배 냄새. 느릿한 눈빛까지도 어딘가 낯설었다. 종만이 삼촌은 큰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가 민정이를 발견하자 담배를 비벼 껐다. “어이.” 낮고 굵은 목소리. “못난이, 잘 지냈나?” 민정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민정이가 밤거리를 떠돌던 이유 중 하나도 종만이 삼촌 때문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으로 데려가 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다니냐고 물어봐 줄 것 같았다. 어릴 적 자신을 번쩍 안아 올리던 그 삼촌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종만이 삼촌은 민정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 민정이 맞냐?” 반가움보다 원망이 먼저 올라왔다. 왜 이제 나타났는지. 왜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는지…. 그동안의 서러움이 밀려왔다. 종만이 삼촌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눈빛이 왜 그러냐.” 순간 민정이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완전 딴 사람이 됐네.” 거실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잠시 침묵하던 종만이 삼촌이 한숨처럼 말했다. “애들이 그러더라. 민정이 닮은 애가 밤거리 돌아다닌다고.” “…….” “근데 직접 보니까 알겠다. 그냥 닮은 게 아니네.” 막내 숙모는 괜히 식탁을 닦는 척했다. 종태 삼촌은 한동안 민정이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너 그러고 다니다 진짜 큰일 난다.”
그 말이 이상하게 더 아팠다. 걱정 같기도 했고, 동시에 선을 긋는 말 같기도 했다. 이제는 “우리 민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예전에 잘못되면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하던 삼촌들이었는데. 민정이는 그제야 알았다. 민정이는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은 울고 있는 사람은 불쌍해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남으려는 사람은 경계했다.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이 어디까지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고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민정이는 방으로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벽에 기대앉았다. 밖에서 흰둥이가 쇠사슬을 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예전에는 품에 안고 자던 강아지였다. 하지만 어느새 허리춤까지 커버린 흰둥이는 집안에서 점점 귀찮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밥그릇은 자주 비어 있었고, 누군가는 컹컹 짖는 소리에 시끄럽다고 짜증을 냈다. 민정이는 문득 흰둥이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이였을 때는 모두가 챙겨줬다. 하지만 외모가 변하고, 눈빛이 변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시선을 거두었다.
샤크 아이들도 하나둘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마지막으로 자기 편이라 믿었던 어른마저 결국 낯선 사람 보듯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시원했다. 이제 정말 아무도 없구나.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실망시킬 사람도 없구나.
민정이는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엄마가 가끔 돈을 꺼내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예전 같았으면 손도 대지 않았을 돈이었다. 한참 동안 지갑을 내려다보던 민정이는 조용히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주머니 속으로 접어 넣은 뒤에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밖에서는 장지동 골목의 눅눅한 밤공기가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민정이는 주머니 속 지폐를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생각보다 쉬웠다. 민정이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원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