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에 이어) 그녀는 형식적이나마 한발 뒤로 물러섰다.
“죽지 않았으면 우리가 범인을 알 수도 없었겠지. 시(詩)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현주는 별로 억울할 것도 없을걸.”
애영이 무심코 대꾸했다. 그녀는 애영이 말하는 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애영을 쳐다보았다. 시라니. 대체 무슨 시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현주가 시를 쓴 적이 있었던가. 현주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싶어 현주를 떠올렸지만 기억의 어디에도 시를 쓰던 현주의 모습은 없었다.
"시가 남아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의아해하며 묻자 애영이 일순 난감한 표정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애영을 보자 궁금증이 더했다. 그녀는 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윤도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윤은 애영이 금기의 말을 꺼냈다는 얼굴로 애영에게 못 말린다는 시선을 던졌다. 애영이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눈치였다.
"미안하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너에게 한다는게 좀 그랬거든."
"나는 무슨 소린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아."
"그럴 거야. 어차피 알게 됐으니 이젠 숨기고 말 것도 없겠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말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현주는 시인이 되었어. 그것도 꽤 유명한 시인."
"유명한 시인?"
“어, 꽤 유명해. 죽기 일 년 전쯤 등단했는데, 자살해서 더 유명해진 거같아."
현주가 시인이 되었다는 말보다 자살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시인의 자살이라니 문단에서는 쇼킹한 사건이었겠지. 그래서 아마 자연스럽게 세를 탄 모양이야."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람들은 단순한 죽음을 보았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현주가 시인이 되었다니, 그건 그녀가 상상하던 일이 아니었다. 시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백안시되고 있을 때, 잠자다 가위에 눌려 땀에 젖어 있을 때, 외로움에 혼자 맥주를 홀짝거릴 때, 현주는 고상하게 시나 쓰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녀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속은 기분도 들었다.
그녀가 낯선 곳에서 칩거하여 사는 동안 현주는 이 땅을 당당히 밟으며 활보했을 것을 생각하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때의 그 사건처럼 현주는 치밀하게 계산하여 죽음을 관리했을 것 같았다. 그때도 현주는 눈을 감고, 친구의 돈을 훔쳤다. 훔쳤을 뿐이 아니라 친했던 그녀를 범인으로 몰았다. 현주는 훔친 그 돈을 엉뚱한 곳에 썼다. 양심을 팔고 훔친 친구의 돈으로 남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멜라니 사프카의 노래를 들으러 찻집을 순회했으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옷을 사 입었다.말초적 쾌락을 위해 훔친 돈을 쓰면서도 숨죽이며 우는 그녀의 고통을 모른 체했다. 현주는 그렇게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계속)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