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외에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 역원이 그녀가 내민 티켓을 받았다. 살피듯 쳐다보는 역무원의 시선을 피해 그녀는 퇴락한 역사를 바라보았다. 사냥 오두막 같은 슬레이트 건물로 사무실과 대합실이 각각 하나뿐인 오래된 간이역은 예전보다도 더 낡아보였다. 도심의 변두리에 위치한 그 역은 아픈 기억과 연관되어 청춘의 아릿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채 그녀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철길 옆으로는 길게 뻗은 거리, 번영로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썰렁한 역사를 빠져나와 그녀는 춥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한동안 막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십여 년 전, 거리를 통과하여 대학에 다녔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에도 그녀는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가슴을 지나 머리끝으로 올라갔다.
대학은 상처와 함께 그녀의 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깊고, 끔찍했던 상처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서 엄격하게 생을 관리하도록 그녀에게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그녀를 끈질기게 고문하던 과거가 없어졌으니 앞으론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도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상처를 벗는 일이 현주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강조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핑계대고, 현주의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고국을 생각했던 것도 스스로에게 가한 채찍일 뿐이었다. 새 삶을 마련할 기회는 많았다.
번영로로 무겁게 첫발을 내딛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그녀의 야윈 볼을 훑고 지나갔다. 길가에 헐벗은 채 떨고 있는 앙상한 가로수들이 먼저 그녀를 반겼다.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그녀가 졸업하던 해에 벚나무로 교체되어, 꽃피는 계절이면 거리가 화사하게 살아나 장관을 이룬다고 했다. 꽃물결을 보려고 이 작은 도시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적인다는 말을 들었지만 겨울의 거리는 왠지 스산하고 추워만 보였다. 그녀는 외투의 깃을 세우고, 행군하는 병사처럼 용감하게 바람 속을 걸으며 학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에서도 병원의 건물들은 아주 잘 보였다. 멀리 펼쳐진 산자락 아래에 회색과 빨간색, 그리고 흰색의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서 있었으며,회색의 사층 건물도 선명하게 보였다. 학생 때 실습 나갔던 병원은 그녀의 가슴에 그리움과 아쉬움, 얼마간의 원망이 섞인 미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십 분쯤 걸어 병원 입구와 맞닿아 있는 이차선 도로에 도달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으므로 동창회는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제시간에 맞게 도착할 생각은 없었다.사람들과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어울려 떠드는 일은 그녀에게 혼란을 느끼게 할지도 몰랐다. 모처럼의 방문도 윤을 만나려는 계획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고국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그녀는 떠난 지 이십 년 만에 처음 찾아왔고, 소식을 들은 윤이 그녀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윤은 이번 기회에 모두를 용서하라고 말했지만 윤의 얼굴을 본 후엔 즉시 돌아설 생각이었다. 윤이 한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는지, 입장이 바뀌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 (계속)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