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에 이어) 윤은 그녀의 방문이 화해를 시도하는 제스처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고리를 걸어 단단하게 잠근 마음의 빗장을 이제야 열었다고 지레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땐 햇빛에 희게 바랜 광목처럼 처참한 기억들을 말끔히 씻었다고 생각했다. 표독스럽게 굴었던 친구들, 모래 바람으로 그녀를 휩쓸어 묻어 버린 현주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뜩이며 노려보던 성난 눈빛들이 떠오르고, 굳은 표정들과 뒤에서 수군대던 목소리들이 어느 날, 환청처럼 들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예전의 섬뜩했던 기억 속으로 그녀를 다시 추락시켰다.
용서하고 다 잊었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인다고 해도 기억들은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때론 낫지 않는 부스럼처럼, 상처는 마리의 망령이 되어 쇠사슬로 무겁게 발목을 짓누를 것이라는 두려움이 솟았다. 어쩌면 현주도 그렇게 살았을지 몰랐다. 일그러진 내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벌겋게 짓눌린 속살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위장하며 살았을 수도 있었다. 그녀만큼 측은한 삶이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현기증이 솟아 잠깐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이슬처럼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감았던 눈을 뜨고, 모질게 눈물을 털어 낸 후에 걷기 시작했다. 외면하고 거부했던 낯익은 길을 따라,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가까이 갈수록 성냥갑처럼 단조로운 건물들이 나타났다. 부족한 간호 인력으로 터무니없이 불어난 학생 수를 감당하기 위해 학교는 새로 지어졌다. 건물은 공룡처럼 크고 거대해졌지만 아기자기한 옛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의 입구와 학교의 중간에 위치한 기숙사는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낮고 둥그스레한 언덕에 자리한 위쪽의 교회당과 아래쪽 귀화 양로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습들이 변하지 않고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그곳은 당시에도 은둔자들의 처소처럼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서로를 의심하며 광풍의 열기에 휩싸여 그녀를 녹여 버릴 듯 했어도 겉모습은 평화라는 보호막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용광로의 타오르는 불처럼 끓는 화를 간직한 사람들, 그들은 집단으로 떠들어 댈 뿐, 정작 개인의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 일은 애영이가 등록금을 잃어버린 직후에 벌어졌다.
모두들 며칠째 시달리고 있었다. 도둑이 나올 때까지 점호 시간은 늦추어졌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날마다 반성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위로부터 압력이 점차 거세어지자 모두가 지쳤다. 일이 빨리 해결되기를 바랐지만 범인은 흔적조차 없었다. 아무도 범인이라고 나서지 않았다.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시간이 못 견디게 싫었다. 정확하게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찾는 일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조그만 단서라도 있었으면 바랄 때였다.
- 지은이가 그날 채플에 안 나가고 애영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지은이가 수상해.
말은 순식간에 퍼졌고, 그녀는 졸지에 도둑으로 몰렸다. 그리고 한방에 모인 그들은 그녀를 소환하였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강의실을 찾던 그들이 적으로 돌변했다. (계속)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