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10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 선언’ 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 전원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15명 등 모두 2,300여 명이 사면 복권된다. 그 속에는 ‘김대중’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전국의 주요 도시에 축하 현수막이 내걸리기 시작한다. 군산의 중앙로와 역전광장 등에도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고,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해 9월 8일 김대중은 광주를 방문해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고향인 목포와 하의도를 각각 방문하였다. 광주 방문은 16년, 목포와 하의도 방문은 28년 만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27일에는 미국 최대 노조인 산별노조총연맹(AFL-CIO)에서 수여하는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김대중은 1988년 봄에도 군산에 다녀간다. 아래는 그해 4월 12일 치 <조선일보> 기사(제목:‘김대중 씨 새마을 비리(非理) 7조(兆)’) 내용이다.
“평민당(平民黨)의 김대중(金大中) 전(前) 총재는 일요일인 11일 점퍼 차림으로 이리(裡里) 지구당(위원장 이협) 창당대회에 참석, 지원 유세를 한 데 이어 익산(益山) 김득수(金得洙), 군산(群山) 채영석(蔡映錫), 옥구(沃溝) 김봉욱(金奉旭), 진안(鎭安)-장수(長水) 이상옥(李相玉), 순창(淳昌)-임실(任實) 지구당 홍영기(洪英基) 등 6개 지구당을 돌며 본격적인 호남(湖南) 득표 활동을 시작.”
이날(11일) 오후 군산 월명공원에서 열린 집회에는 채영석 후원회 이름으로 된 ‘3번 찍은 우리들 또 찍자 3번’, ‘군산의 자존심 채영석’ 등의 현수막이 내걸리고 전북 연청회원 50여 명이 대회 전 노란색 깃발을 앞세우고 도보 행진을 하며 기세를 올려 눈길을 끌었다.
김대중은 연설에서 전경환(당시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명예회장 겸 명예총재) 씨의 부정 액수와 관련, 그동안 주장했던 ‘7천9백억 원’에서 10배를 올려 ‘7조 9천억 원은 넘을 텐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고, 군중은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다. 그는 또 “전두환-전경환 형제가 용감무쌍하게 해 먹었다.”, “전경환의 부정은 전두환 씨에 비하면 해와 달 정도에 비교된다.”라고 주장했다.
전경환은 1988년 73억 6천만 원 횡령, 새마을신문사 10억 원 탈세, 4억 1,700만 원의 이권 개입 등 7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이듬해(1989) 5월 징역 7년, 벌금 22억 원, 추징금 9억 원의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으나 1991년 6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