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대 총선(1985) 이후 야당과 재야 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줄기차게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다. 이에 신군부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모든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 요구와 4·13 호헌 조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청년들과 시민단체는 대규모 가두집회로 대항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경찰력이 마비되고 군부대 투입설(위수령)까지 나도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군부대 투입을 검토한다. 위수령이 발동될 징후를 알아차린 미국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군부대 투입을 저지했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는 빗발쳤고 국민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위원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해 6월 29일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 조치를 발표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 정통성 결여를 지적하는 직선제 개헌 요구와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온 선언으로 이름하여 ‘6·29 민주화선언’이다.
위 사진은 제13대 대선에 출마한 평화민주당(평민당) 김대중 후보 유세장 모습이다. 날짜는 1987년 11월 18일(수), 장소는 군산시 사정동에 자리한 월명종합운동장이다. 그날은 평일이었고 비까지 내렸음에도 운동장은 인파로 넘쳐났다. 특히 ‘6·29 선언’으로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접선거가 16년 만에 치러져 유세장은 서울과 지방 가리지 않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날 유세는 군산 미공군비행장 미군들도 취재에 나서 유세장 분위기를 달구었다. 연설을 마친 김 후보는 우중임에도 무개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 시민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당시 언론들은 김대중 후보가 연설하는 동안 운동장과 사정동 로터리에 이르는 6차선 도로 약 2km는 승용차, 버스, 트럭 등으로 길이 막힐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민정당은 '안정 속의 개혁', 야당은 '군정 종식'을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김대중 후보는 '보통 사람'임을 강조하는 노태우 후보를 두고 "평생 무당질에 목탁 처음 봤다는 말은 있지만, 내 육십 평생에 가가호호(家家戶戶) 선물을 돌리는 보통 사람은 처음 봤다"라고 해서 유세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김 후보는 "노태우 후보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육군 대장 출신에 쿠데타 주모자이고, 독재자"라고 강조했다.
김 후보는 군산에서 1박 하고 다음날(19일) 김제로 떠났다. 그는 출발에 앞서 "노태우 씨는 자기가 당선돼야 안정이 있고, 6·29 선언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됐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공박하고 "12·12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정치·경제·사회 부조리에 책임이 있는 그가 어찌 안정을 말할 수 있느냐"라고 비판했다.
유세 사진을 접할 때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지인이 떠오른다. 후덕하면서도 절약 정신이 강했던 지인은 중소기업체 사장으로, 김 후보가 군산을 다녀간 후 정치헌금 20만 원을 기탁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 기관으로부터 위압적인 전화가 걸려 오고, 세무조사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어 주위를 안타깝게 해서다.
# 온갖 부정 난무했던 13대 대통령 선거
제13대 대선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어렵게 되찾은 직접선거이니 축제 분위기로 치러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열기가 더할수록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와 흑색선전, 폭력이 난무했고,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여당의 부정행위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노태우, 김영삼 후보의 광주, 군산, 전주 유세와 김대중 후보의 부산, 대구 유세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상대 지역에 전쟁하러 가는 모습으로 비치는 유세전이 각 언론에 생생히 나가면서 한반도는 영호남을 철저히 갈라놓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에 야당들은 집권 연장의 산물로 사전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조작, 부채질했다고 주장했고, 여당은 두 김씨의 경쟁이 불씨가 되었다고 역공을 펼쳤다.
언론도 여당 편이었다.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최영 지음)에 따르면 특히 민족지를 자처하는 신문사의 김 아무개 기자는 계산된 질문으로 호남 민심을 자극했다. 김대중 후보에게 "미국 망명 중일 때 그곳 신문과 대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냐?"라고 물었던 것. 김 후보는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라고 답변했으나 언론들은 '김대중 후보는 말 바꾸기를 다반사로 한다'는 내용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노태우 후보 측에서도 '이때구나!' 하고 김대중 후보를 향해 색깔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며칠 후 김 아무개 기자가 제시한 미국 신문 기사를 확인한 결과 김 후보의 답변이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많은 유권자에게 김대중 후보가 거짓말했다는 것만 각인시켰을 뿐 원위치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13대 대선은 민주화운동의 결정체로 여당은 국민 앞에 겸허히 고개 숙이고 참회하는 자세로 공정선거를 유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야당 당사 피습, 입당 강요, 금품 살포 등을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특히 아무개 장관은 공사 기공식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추석을 전후해서는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한 선물 공세가 펼쳐졌다.
군산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13대 대선 때 동사무소 사무장이었던 최영 시인(작고)은 자신이 쓴 책에서 "그때는 동장과 민정당 동(洞) 협의회장이 긴밀한 협의 속에 선거를 치렀다"며 "선거가 다가오면 통장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여당 후보를 돕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임용되던 시절"이었다고 술회했다.
# 김대중 후보, 자서전 통해 잘못 인정
13대 대선은 828만 표(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 당선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봉인되지 않은 부재자 투표함에서 무더기 표가 쏟아지고, 환표 부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투표용지, 붓두껍, 인주 등이 감시단에게 적발되는 등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투표 전날 노태우 후보가 기자회견에서 "선거 결과에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대목은 의구심을 살만했다.
다수 국민은 여당의 부정선거와 노태우 당선보다 두 김씨의 단일화 실패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두 김씨가 얻은 표를 합하면 노 후보보다 400여만 표가 더 많아 국민의 상실감은 더했다. 비난의 화살은 인구와 경제력이 약한 호남 지역 후보 김대중에게 더 많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자서전을 통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스럽다고 밝히고 있다.
"많은 민주인사의 희생과 6·10 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국민의 직접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물론 단일화했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저들의 선거 부정을 당시로써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 (<김대중 자서전> 536쪽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2012년 12월 19일)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대선후보 등록일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야권 후보 단일화 규정 협상을 잠정 중단했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18일 저녁 긴급 회동을 하고 협의 재개에 합의했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으로 민주주의를 한 걸음 앞당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