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에 이어)
만나 보지 못한 사이 완연해진 귀밑의 흰 머리칼과 윤기를 잃어버린 메마른 피부가 보였다.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책임을 추궁하면 모든 게 당신 탓이라고 되받아칠 생각이었는데 앞에 앉아 있는 그가 초라하고 늙은 모습이어서 순간 측은했다.
"경채가 그러더군. 기성세대는 비겁하다고. 잘못된 것을 묵인하고, 틀린 것을 왜 바로잡지 못하느냐고. 생계가 걸린 문제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런 삶은 굴종이라고 날 몰아 부치더란 말이야. 그게 어떤 면에선 죄가 된다면서."
"경채가 그랬어요? 무슨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는 다급하게 물었다.
“며칠 전이었지. 공중전화인 것 같았는데 짤막한 통화만 했어. 그 애는 당신 걱정을 많이 해. 당신에게 안부를 좀 전해 달라고."
"그것뿐이었나요?"
"그 애는 내가 당신을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어. 아니, 명령이었다고 해야겠지. 그놈 참, 도대체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경채가 왜 남편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어렴풋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남편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아들은 유난히 말이 많았다. 그리고 홀로 있는 남편의 고독을 담아 와 슬쩍슬쩍 흘리곤했다.
- 어머니,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할 마음이 없으세요?
-그런 건 묻지 마라. 우리의 일이야.
- 어머니의 가장 큰 결점이 뭔지 아세요? 고집이 너무 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을 넉넉하게 가져 보세요. 따뜻하고 너그럽게요. 헐렁한 게 엄격한 것보다 사는데 훨씬 유익하거든요. 어머니가 힘들게 사시는 게 안타까워요.
아들은 용서에 인색한 그녀를 안쓰러워했다. 그런 말에는 관심 없는듯 그녀는 그때마다 무료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몇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배반은 참을 수 없어 아들에게 불만이었고, 남자라 별수 없다고 여겼다.
"녀석은 대단해. 할 일이 있어서 아직은 붙잡힐 수가 없대."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늙는다는 것은 비열해진다는 뜻이기도 해. 타협을 생각하는 것 말이야."
그것만이 아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바라거나 이룰 수 없다는 것, 죽음에 한발 가깝게 다가선다는 것, 그런 게 더 크다. 마흔다섯의 나이가 늙었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는 일흔다섯처럼 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같이 살 땐 이런 공백의 시간들이 없었다. 할 이야기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 책에서 읽었거나, 주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그녀는 털어놓지 않고 배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남편의 하루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남편이 종일 무엇을 했는지 꼬치꼬치 묻고따졌다. 그런데 지금은 할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 애는 떠났어"
침묵을 참아 내기 어려운 듯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여자, 아니 그 애, 그가 그 애를 발음할 때 약간 어색했다.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그 문제는 그에게나 그녀에게 있어 아킬레스건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예민한 문제를 터트린다. 찜찜한 모양이다. 그는 예전에도 뭐든 확실한 것을 선호했다.
"떠나던 날, 그 애가 당신 얘기를 했던 게 생각나는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만났다고 했어. 당신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자신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어."
여자의 말을 전하며 남편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행복하게라니,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를 사랑했던 여자에게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이러니했다. 그 애가 아니었어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 일이 벌어졌던 사실로 남편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계속)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