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붉은 신호등 11-2
상태바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붉은 신호등 11-2
  • 김선옥
  • 승인 2022.12.31 07:20
  • 기사수정 2023-01-09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료사진=투데이 군산
자료사진=투데이 군산

(…#11-1에 이어)

"주님이 모두를 보호하실 겁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단순한 안부 전화인 것을 괜히 철렁했다. 절박한 때에 주님이나 찾는 걸 보면 생각처럼 신통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인이 경채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혼란스럽고,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켜 엉망이다.

아들이 떠난 후, 그녀의 생활은 거의 기계적이다. 정확한 시각에 출퇴근했고, 아파트 구간에서 버스를 내려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와 방 안의 기류를 살핀다. 달라진 건 없는지, 그녀가 없는 사이에 다녀갔는지 냉장고를 열어 보고, 아들의 방도 들여다본다. 전기밥솥의 밥과 식탁 위의 반전을 확인하여 아침에 나갈 때와 변화가 있는지를 체크했다. 변화가 없는 그대로인 것을 알게 되면 온몸의 기운이 스르르 빠져 버린다. 반복된 일상은 그녀를 지치게 한다.

맥이 풀린 그녀는 현관이 보이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시선을 빛내며 현관을 응시한다. 고르게 난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아들이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눈앞에 서 있을 것만 같다. 붙잡기 위한 덫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들이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언제였는지 희미한 기억이지만 도망자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 외국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쫓기는 자의 겁에 질린 얼굴과 이지러진 표정, 숨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에 스릴을 느끼며 방관자의 위치에서 영화를 보았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즐겁게 보았던 영화,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화면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라 이따금 가슴에 통증을 일으키곤 했다.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빨리 자수 시키세요. 길어지면 더 불리해요. 고수머리에 체격이 우람한 형사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아들의 방을 뒤졌다. 그런 다음이면 언제든 그녀를 협박하는 말을 흘렸다. 추적자의 당당함을 과시하며 그가 거리낌 없이 협박의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녀는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아들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검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나 검거당할 위험에 처한 아들은 하늘과 땅 어느 곳에서도 마음 놓고 쉴 곳이 없다.

어쩌면 막연한 기다림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아들과 접근하는 일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그녀에게 망설임을 준다. 아들은 붉은 신호등 저편에 있고, 그녀는 안전지대에 있다. 아직은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들이 떠나 버린 것은 그녀에게 심한 배반이다. 아들이 추구하는 것이 사상인지, 꿈과 이상인지, 아니면 젊은이의 용기인지 그건 모르지만 그녀의 그늘을 과감히 벗어난 것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아들은 그녀를 이해했고, 남편과 다르게 그림자처럼 곁에 남아 그녀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예상을 뒤엎고 아들도 남편처럼 용감하게 울타리를 빠져나갔다. 돌연한 변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처음에는 막막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에 남편의 배반을 알았던 그때처럼 슬펐다. 남편처럼 아들 역시 알 수 없는 존재다.

사랑했으므로 남편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그녀에게 언제나 통증을 일으킨다. 고아로 남겨져 거친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여 만났던 그는 호탕한 웃음소리로 단번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눈짓과 섬세한 손놀림, 그의 감정까지도 그녀는 사랑하였다. 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에 빠져 버렸다. 부하 여직원과 그런 식의 배반을 모의하다니, 그녀는 치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하게 남편을 소유하려던 것이 잘못일 수도 있었다.

-불장난 같은 것이야. 당신을 배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자극하지 않으려는 궁리였겠지만 남편은 무책임하게 말했다. 그 말에 분노를 느꼈다. 바람기를 드러내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은 말투로 변명을 늘어놓는 남편에 대한 혐오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과장님을 사랑했어요.

손님이 드문 찻집에서 여자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젊고 아름다웠던 여자는 불륜을 사랑이란 낱말로 감싸서 내밀었다.

-그건 사랑과는 다른 거야. 일종의 충동적인 호기심이지.

남편은 다르게 표현했다.

여자의 순진한 감성을 이용한 남편의 결핍된 도덕심에 비애를 느꼈고, 치졸함 때문에 수치심이 들었다. 솔직한 심정이었을지 모르지만 순수와 눈물을 농락한 남편의 행위를 도무지 용서할 기분이 아니었다. 깨끗하고 양심적인 생을 설계한 그녀는 노여움으로 가슴이 이글거렸으며 아름다운 사랑이 얼룩으로 더럽혀졌다고 여겼다.

그래서 헤어졌다. 남편은 결벽증에 부대끼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는 배반의 수모를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치사하고 비열한 남편을 위해 그녀는 용서의 아량과 포용력 따위로 자존심을 구겨 버릴 수도 없었다. 남편도 그랬을지 몰랐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달랑 가방 하나만들고 떠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