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에 이어)그녀가 일깨우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경쟁해서 이기려고 수단을 부렸다는 그녀의 말에도 악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이야기를 추려 내는 것은 떠나는 자의 배려였다. 떠나면서 내가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병석에서조차 삼각구도로 가두는 그 말을 나는 과감하게 끊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던 내 삶은 미순과 주호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내게 황야를 헤매게 내몰았다고 주장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날카롭게 쪼아 대는 내 기억의 상당 부분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정지된 시절의 화면이 불현듯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고, 오래된 앨범에 부착된 빛바랜 사진처럼 드러난다.
그들은 때때로 희미한 추억 속에서 불쑥 뛰어나와 모퉁이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공유한 세월은 의미가 있고, 잃어버린 기억은 소중한 삶을 잃는 것과 같다. 어쩌면 그들로 인해 상처 입은 내 삶이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과거는 그저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드러나던 시절, 추억에 매달린 끈도 이제는 흐릿하다.
주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몸서리치게 헤어지지 않았다면 무엇이든 아름답게 기억했을 것이다. 함께 경험했던 일이나 사소한 행동까지 되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아리송하기만 하다. 기억이라는 것이 묘해서 끈을 놓치면 더러 막막하고, 가물거려서 어쩌다 되살리려면 골치가 아프다.
세월이 지나면 감정도 말라비틀어지는지 그로부터의 상처와 함께 그와의 시간들도 탄력을 잃었다. 고개를 숙이고 추억의 상자에 숨은 정체를 퍼 올리려 노력하지만 이것인지 저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한 세월에 그가 없어서 유감이다. 미순이라면 나처럼 애매하게 더듬지 않고, 똑똑하게 기억할까. 돌아오지 않았지만 주호는 여전히 그녀의 남편이니까.
나이가 들면 종종 옛일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쌍둥이처럼 자랐으며 발뒤꿈치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상대의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내고, 숨기지 않던 우리의 사이가 변한 정확한 시기는 아마 고등학교 진학 이후였을 것이다. 하교 길에서 주호가 느닷없이 내게사랑을 고백했던 이후 말이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던 미순의 표정, 그녀의 눈에 반짝이던 이슬을 나는 보았다. 내가 마른침을 삼켜야만했던 그날, 그러기까지 미순이는 나를 목숨처럼 아꼈다.
아니, 그렇다고 자신했으나 그녀의 심장에 주호가 못을 박은 이후로 나는 친구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이후로 미순이의 속 깊은 말을 나는 들을 수 없었다.서먹한 관계로 변한 것에 마음이 괴로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미순이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그 새끼가 병원에 찾아왔었어."
“누구? 주호?"
"그래 어디서 내가 죽는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멱살 잡아 패대기라도 치지."
"귀신해라. 그러고 싶었는데 멱살 잡을 힘이 없어서 그냥 뒀어. 용서해달라면서 무릎까지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말하면서 미순이는 깔깔대며 웃었다.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이 썼다.
“찾아와서 꾸역꾸역 용서해 달라니 무슨 배짱이었을까. 정신을 차렸는지 지옥 갈 일이 끔찍해서 찾아왔는지 감이 안 잡혀. 너 올 거라니까 꽁무니를 빼고, 허겁지겁 도망쳤어. 꼴이 가관이었는데 웃지도 못하고 혼났다."
미순이의 말투는 참으로 씁쓸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지.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인심 쓰면 좋잖아.""그 인간에게 내가 왜 인심을 써? 인심이 남아돌아도 싫어. 그럴 기분 아니니까."
"아무래도 심사가 꼬였나 보다. 그래도 한때는 열렬하게 사랑하지 않았나."
"얼어 죽을 사랑은 무슨. 죽은 자식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해서 찢어죽이고 싶어. 누구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 꼴인데.”
실제로 욕을 먹어도 싼 그였지만 마음이 착잡했다. 가볍거나 홀가분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못했다. 이유가 뭐였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한때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실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발 참으세요.”
“참으니까 이 정도지. 보아하니 목구멍의 때 벗는 일도 어려워 보이더라. 주제꼴이 말이 아니더라고. 하긴 주제에 뭘 하겠어. 어디서 죄 없는 년 하나 골라서 아작 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죽게 된 처지라 대놓고 악담은 못했지만 자식 버린 새끼가 어디서 잘 살기 바라겠냐."
과거를 상기시키다가 그의 궁색함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미순이의 이 죽거리는 솜씨는 그녀의 어머니를 닮았다. 입은 질펀하게 걸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오래된 녹물을 벗겨 낸 듯 개운했다.
“네게 고백할 게 있어."
"고백이라니까 괜히 무섭네.“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 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행복하게 지낼 수있었어. 남자란 수컷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흔들리지 말고, 지금처럼 굳세게 살아."
말을 마친 미순이는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가슴에 얹혔던 게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주호와 헤어진 뒤로 나는 남자를사귄 적이 없다. 미순이는 그걸 생각했을 것이다. 도를 이룬 것처럼 달관한 표정의 미순이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밝은 표정은 마지막 돌아가는 길목에서 주호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