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2구는 15가구 3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2017년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개통되면서 선유2구는 관광명소가 됐다. 선유도해수욕장과 짚라인이 대표적이다.
해수욕장 입구에는 식당과 리조트, 커피숍이 모여 명실상부한 옥도면 최대 번화가이기도 하다.
선유2구의 역사는 고군산진이 세워진 16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00년 가까운 역사의 뿌리를 간직한 곳이 선유2구인 것이다.
선유2구는 육지와 섬을 잇는 여객선의 운항으로 선착장이 생기면서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학교와 교회가 들어섰다.
현재에도 해수욕장 뒤편으로 도로확장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멸종위기 흰발농게를 5월부터 11월초까지 언제든 볼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선유도 초등학교는 1946년 개교했다.
선유도 마을에 서당이 있었지만 여성들에게는 공평한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초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선유도엔 근대식 교육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이 곳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선유도 초등학교의 덕인 셈이다.
1965년 740명 어린이들이 서울여행을 떠났다. 서울여행에 해군함정 2척이 동원됐다. 이 사실에 '수학여행'이라는 영화가 제작됐고, 국제영화제에 출품돼 수상하기도 했단다.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사용하는 선유도 중학교가 있다. 선유도중학교를 말하자면 배처자 교장을 빼놓을 수 없다.
수녀인 그는 30년 간을 카톨릭계 중고등학교에서 교육에 헌신했다. 그러던 1964년 선유도국민학교 근무를 자원했다.
특히 그는 가정형편상 아이들이 육지로 나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늘 안타까워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교사 2명을 채용해 아이들이 이 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뿐 만이 아니다. 그는 1968년 교실 2개를 갖춘 고등공민학교를 사재로 건축하고, 이후 도립 고등공민학교로 인가를 받아 도교육위원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선유도 중학교는 선유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무녀도, 신시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 학생들까지 통학선을 타고 다녔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통학선이 운항되지 않아 학생들은 등교하지 못했다. 당시 학교에 오지 않은 학생들이 왜 그렇게 필자는 부러웠는지…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선유도보건소 역시 배처자 교장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카톨릭병원에서 의약품 지원을 받았고, 수녀원에서 간호원(현 간호사)을 파견받아 선유도 주민들의 진료복지 혜택에 도움을 줬다.
탁아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맡기고 어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택을 개조해 보육에도 힘쓴 것이다.
이처럼 선유도 주민에게 근대식 교육과 의료시설을 접할 수 있게 헌신한 배처자 교장에 대해 필자 역시 어렸을 적부터 익히 들어왔다.
선유도 주민들은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선유도 초등학교에 공덕비를 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배처자 교장의 업적과 공로가 점점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선유도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있다보니 고은 시인이 떠오른다.
필자가 고은문화사업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관련 행사를 열 때 고은 시인이 군산을 방문해 선유도에 대해 회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선유도로 피난을 와서 망주봉과 파도를 벗삼아 지내면서 청소년기의 감성을 간직할 수 있었단다.
'노래섬'이란 시(詩)도 선유도에서의 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노 래 섬
내 고향 앞바다에는/아주 궁금하게/여기저기 섬들이 잠겨 있습니다/그 가운데 자그마하게/노래섬이 잠겨 있습니다
서해 난바다 큰 바람이 닥쳐오면/으레 그 섬 둘레에서는/어김없이/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먼 예로부터/큰 바람에 죽은 고기잡이 혼령들이/큰 바람 때마다 어김없이 나와/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며칠이고 밤낮으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그런 노래섬을 바라보며/자라난 나에게도/황공하올 혼령이 눌어붙어/오늘에 이르도록 노래하는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간혹 숙연한 세월임에도/어설프게/어설프게만 노래하는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선유도중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300년된 팽나무가 쓰러져 있다.
2011년 전북일보에 보도된 '300살 탱자나무 쓰러질 위기'의 기사에 나온 사진처럼 10여년전에는 밧줄이라도 버티며 서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땅에 쓰러져 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주민들이 탱자나무의 안타까움을 전하며 보호장치를 해주길 원했다고 했으나 이미 나무가 쓰러진 후 울타리를 만들어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선유도 파출소와 보건소를 지나면 '군산진 절제사비(節制使碑)'가 있다.
예전에는 절제사비 바로 앞이 바다였다. 도로를 넓히기 위해 뒤쪽으로 옮겨졌단다.
이후 절제사비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됐다.
필자는 펜스라도 설치하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시는 문화재가 아닌 탓에 펜스 설치는 어렵다는 답변을 해왔다. 아쉽고, 서운했다.
그렇지만 올해부터 그 주변 제초작업을 시작했단다.
절제사비 위쪽으로는 고군산진이 있었던 곳이다.
그동안 밭으로 사용하던 이 곳은 잡초들로 무성하지만 지금도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보면 기왓장과 건물의 기단석을 언제든 볼 수 있다.
현재 두 차례 지표조사 결과보고서가 남아 있다.
2020년 7월 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는 '고군산진의 역사와 선유도 관광자원 발굴'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군산대 사학과 김종수교수의 강의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후기 고군산 주민은 여지도서, 고군산진지(古群山鎭誌)의 기록에 의하면 총 1,544명(남자 948, 여자 596)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남자들은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한편으로 돈을 받고 수군 진에서 근무를 하여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군산 주민의 부유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영조 때 있었다. 1762년(영조 38) 고군산의무사 김상건(金尙健)이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쓰라고 하면서 쌀 1,300석(石)을 국가에 납부한 것이다."
"당시 1석(石)은 15두(斗)이므로 1,300석은 쌀 1,950가마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국왕은 김상건의 기부행위에 감격하여 그가 비록 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첨사(僉使)나 오위장(五衛將)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고군산은 흉년에 쌀 2,600가마를 국가에 기부하는 사람이 나올 만큼 부유한 섬이었다. 이러한 부유함으로 많은 유배인들이 고군산으로 들어왔다.“
”1864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군산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 부유하고 집과 의복, 음식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움이 성읍(城邑)보다 훨씬 더하다.(居民多富厚 其屋宅衣食之豪侈 尤於城邑)“
”1895년 이른바 ‘을미개혁’ 때 고군산진은 해체되고 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해방(海防)이 완전히 포기된 것을 의미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와 고종 황제는 ‘전라북도 옥구부 고군산’에포대(砲臺)를 설치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실현된 것 같지는 않다."
"수군진이 없어진 고군산도는 고종 33년(1896) 칙령 제13호에 의해 전남 지도군(智島郡)에 편입되었고, 융희 3년(1909)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주도 하에 고군산진등 지방 관청 건물들이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그후 선유도 진말의 수군진 건물은 1927년 어린아이의 불장난으로 소실되어 없어졌고 오늘날은 그 유지만이 남아있다. “
이처럼 고군산진은 1624년부터 1895년까지 271년 동안 조운과 해방의 임무를 하였던 중요한 곳이었다.
이것 만으로도 이곳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며 앞으로 우리 주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학교 위쪽에 마을과 망주봉을 바라보는 자리에 선유도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오흥덕 목사는 1988년 이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지금까지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교회에서 유치원을 운영할 정도로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컸다.
이제 정년이 3년 밖에 남지 않았단다.
그는 "모든걸 내려 놓고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한다"고 입버릇 처럼 말해오고 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소실된 선유팔경 중 하나인 평사낙안의 팽나무 복원사업에 주민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그동안 선유도의 역사와 문화에 소홀했던 점에 스스로 반성해본다. 이제 관심을 갖고, 주민이 직접 찾아내고 참여하는 모습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선유2구의 번성은 여객선이 닿을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필자가 기억하는 80년대 전후의 선착장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많은 관광객이 찾으면서 현재의 선착장으로 변했다.
이제는 고군산군도 연결도로가 개통되면서 유람선과 어선들만이 외롭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이 모든 개발은 행정에서 주관하고 주민이 따라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른 문제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선유도해수욕장 뒤편 도로개설처럼 공청회를 통해 주민과 함께 고민한다면 여러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앞으로도 시와 주민의 소통이 강화돼 선유2구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임동준 시민기자
ㆍ원광대 일반대학원 보건행정학 석사
ㆍ군산시자원봉사센터 이사
ㆍ현)선유도에물들다 대표
ㆍ현)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 사무국장
ㆍ현)고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