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1구엔 고군산 유일의 염전이었던 완양염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완양(完陽) 염전은 '따뜻한 빛이 있으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의 집앞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면 선유도해수욕장과 선유봉이 보이며 바로 왼편에 선유대교와 함께 무녀1구 마을과 염전을 막은 둑길이 보인다.
무녀1구 마을의 하트섬과 등대를 바라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새만금에서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까지 차를 타고 입도(入島)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상상을 넘어 현실이 된 것을 놓고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올 뿐이다.
무녀도는 '서드리'와 '모개미'라는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구와 2구에 있는 갯벌을 1953년부터 둑을 막아 현재 두 개의 마을이 넓은 평야를 사이에 두고 있다.
향후 고군산 해양케이블카가 들어서면 이 곳이 종착지가 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번화가로 바뀔 예정이다.
무녀도 염전에서 마지막으로 소금을 생산하셨던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인성 어르신을 찾았다.
어르신의 부친은 고 최현칠 옹이다.
부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군 후생장비인 트럭과 포크레인 각 한 대씩을 가져와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갯벌에서 좀처럼 일이 되지 않았다.
그때 당시 30만원을 주며 다른 장비를 통해 일을 했다. 그렇게 2년간 어르신의 부친은 약 100여명의 인부와 함께 염전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막았다.
중간에 둑이 두 차례 터졌다.
누렁개를 산 채로 가마니에 덮어 둑에 묻어 제를 지낸 뒤부턴 문제가 없었다고한다.
이 곳에서 일했던 인부들은 섬으로 도망 온 군기피자들이 대부분이었단다.
당시 군산중학교 다니셨던 최인성 어르신은 이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50~60년대에 고군산에 조기가 많이 잡히자 사람들은 풍선(風船)을 타고 군산까지 가 소금을 샀다.
이 때부터 무녀도에 염전을 만들기로 했단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1899년 군산의 개항(開港) 전후에 삼남(三南)지방에서 어세가 가장 높은 곳이 전라·충정도였고 그 가운데 고군산군도 인근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는 금강을 따라 위치한 강경포구(江景浦口)가 당시 우리나라의 3대 수산물 집산지 가운데 하나였던 점에서 알수 있다.
고군산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위도, 서쪽에는 어청도, 북쪽에는 개야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많고, 금강, 만경강, 동진강 등의 하천 하구에 토사가 넓게 분포되어 고기들의 산란장이었다.
칠산바다의 시작인 고군산과 위도에서 많은 배들이 조기를 잡기 위해 이 곳 무녀도 염전에서 구입한 소금으로 간을 한 후 군산, 강경, 영광 법성포로 팔려나갔다.
또한 이곳 주민들이 여름과 가을에 잡는 멸덤장(멸치잡이)을 하기 위해서도 수시로 이곳의 소금을 가져가 사용했다.
염전 바닥은 처음은 토판으로 해 소금이 검은색으로 나오다가 부산 동래에서 가져온 깔파리(옹기)를 깔고 소금을 생산해보니 소금이 깨끗해졌다.
이후 군산 성산 도자기 공장에서 항아리 조각(흙타일)을 염전 바닥에 사용했다.
그러다가 플라스틱으로 해보니 햇빛에 틀어지는 탓에 다시금 장판으로 바꿨다. 마지막으로 큰타일로 소금을 만들다가 지난 2008년 염전은 문을 닫게 된다.
현재에도 53전의(1전이 3,000평) 염전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새만금 개발공사가 추진 중인 ‘고군산해상케이블카’ 가 오는 2024년까지 완공되면 이곳은 케이블카 종점으로 부대시설과 주차장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돼 아쉬움이 무척 남는다.
또 398억원을 들여 오는 2024년 무녀도해양레져체험복합단지까지 들어서면 염전은 그 흔적마저 사라지게 된다.
필자의 생각은 15만여평의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습지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며 생태체험장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마을 안쪽으로 길을 걸었다.
고군산 유일의 병설유치원이 있는 무녀도 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 유치원생 5명과 초등학생 10명이 다니는 소규모 학교다.
한국전쟁 당시 1952년에 설립돼 65회 졸업생까지 배출했다.
섬마을 소중한 배움의 역할을 다한 공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밖에서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을을 걸어 오른쪽은 엄바위가 있다. 왼쪽은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관광지로서는 조금은 소외되어진 마을이다.
마을은 주로 바지락과 굴 그리고 김양식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곳도 서서히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서드리란 마을 이름은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먹고 살수 있다"는 뜻에서 비롯됐단다.
40~50년 전의 섬생활을 기억하는 필자로서는 어렴풋이 그 시절의 마을 모습을 기억할수 있다.
엄바위는 이 곳에서는 '엄바우'라 불리운다. 여름에는 시원함을 제공하고 엄마 품처럼 편안하다 하여 이렇게 불리우고 있다고 전해진다.
엄바위는 전형적인 해식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해식와는 기반암이 노출된 해안에서 파랑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오목지형을 말한다.
고군산에는 여러 형태의 바위가 있지만 이런 모양은 이 곳 하나뿐이다.
엄바위에서 모감주나무 방향으로 가다보면 바다건너 망주봉이 보인다.
망주봉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바라봐도 늠름하고 위풍당당해 이곳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모감주군락지에 도착해보니 예전에 40여 그루나 있던 것이 이젠 고작 세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일이 있나 싶어 여기저기 전화를 해봤더니 연육교가 연결되기전 건축행위를 위해 나무를 베어냈단다.
한 주민의 말을 빌리면 멸종위기에 처한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이곳 무녀도를 대표하는 자연이 준 귀중한 선물이었단다.
그런데 사람의 편리함으로 사라지게된 모습에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앞 바닷가는 1구항을 넓히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주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서서히 자연이 훼손되는 모습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항개발과 함께 수십억에서 수백억을 지원받는 뉴딜300 사업으로 곳곳이 매립하고 자연을 해치는 것보다는 모감주 군락지를 지켜냈더라면 하는 생각이들었다.
그랬더라면 무녀1구는 분명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마을이 됐으리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을뒷편 예전에 멸치잡이를 했던 바닷가를 찾아보았다.
여기서는 멸치잡는 곳을 '멸덤장'이라 불렸다.
이곳에 가을부터 봄까지 보여지는 노을은 무녀도의 최고의 풍경중 하나이다.
멀리서 보면 바다이고 가까이 보면 호수 같다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 이곳을 말하는 것 같다.
몇장의 사진을 담고 제일 남쪽에 있는 바위에 올랐다.
무녀도에서는 이 곳에서만 먼 위도와 망망대해를 볼 수 있다.
아직 섬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무녀1구의 경우 두세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수 있기에 이 곳을 적극 추천해 본다.
임동준 시민기자
ㆍ원광대 일반대학원 보건행정학 석사
ㆍ군산시자원봉사센터 이사
ㆍ현)선유도에물들다 대표
ㆍ현)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 사무국장
ㆍ현)고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