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계획 없이 여행하는 나에게도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여행지에서는 가능한 현지 음식을 도전하는 것.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콜롬비아의 음식이 꽤 기대됐다. 파나마에서 매일 먹던 집 앞 베이커리의 이름 모를 치즈 빵이 사실은 콜롬비아 빵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였을까?
#1 아레빠 (Arepa)
시계탑을 지나 성곽 안으로 들어가 도시의 밤거리를 걷고 있던 밤이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조명과 건축물만으로 충분히 느껴지는 거리. 나는 그 분위기에 홀린 듯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갑자기 차가운 감각이 떨어졌다. 소나기였다. 사람들은 소란스럽게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 역시 급히 비를 피하다가 어느 작은 노점의 천막 아래로 들어갔다. 고개를 드니 고소한 냄새가 먼저 반겼다. 중남미 지역의 대표 간식,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인 아레빠다. 이는 중남미에서는 간단한 아침 식사 또는 간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치즈나 고기, 계란 등과 함께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되기도 한다.
콜롬비아 여행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레빠 이야기를 꺼냈다. 베네수엘라인 집주인도 집에서 종종 아레빠를 만들어 먹었고, 음식의 기원이 어디냐를 두고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사이에는 늘 소소한 논쟁이 따라붙는다고 했다. 마치 탕수육 소스를 부어먹냐 찍어먹냐 따위의 논쟁 정도일까.
그런데 빗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 아레빠는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만들던 얇고 바삭한 아레빠와 달리, 이건 크기도 두 배쯤 컸고 수플레 팬케이크처럼 도톰하고 폭신해 보였다.
아레빠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밀짚모자를 쓴 한 아저씨가 비를 피해 천막 아래로 급히 들어왔다. 콜롬비아 사람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일을 하고 있고, 카르타헤나로 휴가를 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아레빠 이야기로 흘렀다. 나는 막 저녁을 먹은 터라 괜히 망설이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레빠 두 개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하나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첫 입은 솔직히 조금 애매했다. 겉은 바삭하고 누룽지 같이 고소한 맛이 났지만, 속은 쌀빵과 팬케이크의 중간쯤 되는 식감. 담백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특별하다고 하기엔 조금 심심한 맛이었다. 내 표정에서 그 미묘한 감상이 읽혔는지, 아저씨는 웃으면서 옆에 놓인 소스를 가리켰다. 케첩, 마요네즈, 칠리, 그리고 연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연유를 뿌려 다시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담백했던 아레빠에 달콤함이 더해지자,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맛이 되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단 맛이 그 순간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아레빠는 최고의 음식이라기보다는, 비를 피하다가 얻게 된 작은 보너스에 가까웠다. 계획 없이 걷다 만난 맛, 그리고 누군가의 친절이 함께 얹힌 콜롬비아의 맛. 그래서인지, 연유를 조금 얹었을 뿐인데 유난히 더 달게 느껴졌다.
#2 코코넛 라이스 (Arroz con Coco)
중남미에 오고 난 뒤 가장 자주 마주친 과일을 꼽자면 단연 코코넛이다. 더운 날 외부 일정이 있는 날이면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코코넛 워터를 찾았고, 바닷가나 마트에서도 코코넛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나에게 코코넛은 늘 애매한 재료였다. 단 맛이 전혀 없는 코코넛 워터도, 코코넛 향이 나는 음식도 굳이 먼저 손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르타헤나의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Arroz con Coco. 스페인어로 arroz 는 밥, con coco 는 코코넛과 함께라는 뜻이다. 코코넛 밥이라니. 상상만해도 별로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메뉴판에서 시선을 피해 다녔지만, 여기까지 와서 끝내 먹어보지 않는 것도 좀 이상했다.
그렇게 들어간 어느 식당은 오후 네 시쯤, 애매한 시간대였는데도 생각보다 북적였다. 메뉴판을 받아 들고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결국 고른 건 menu del día, 오늘의 메뉴였다. 메인으로는 돼지고기 구이인 lomo de cerdo 를 고르고, 밥과 사이드로는 코코넛 라이스와 유카 튀김을 골랐다. 유카(Yuca)는 한국에서는 ‘카사바’로 알려진 뿌리식물로, 고구마와 마 사이 어딘가의 식감과 맛을 가진다. 유카튀김(Yuca Frita)은 더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감자튀김 같은 맛이라 파나마에서부터 꽤 좋아하던 음식이다. 주문과 동시에 샐러드 한 접시와 산코초 한 그릇이 먼저 나왔다. 오늘의 메뉴 주문 시 나오는 기본 구성인데, 산코초(Sancocho)는 닭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인 국물 요리로,이 지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생각보다 익숙한, 마치 가벼운 버전(?)의 삼계탕 맛으로, 메인 접시를 기다리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돼지고기 구이와, 생각보다 진한 갈색을 띄던 코코넛 라이스가 담긴 메인 접시가 나왔다. 돼지고기 구이는 약간 짭짤하고 마냥 부드럽지는 않은, 익숙하고 투박한 맛이었다. 입 안의 고기를 다 씹지도 않은 채 바로 코코넛 라이스를 한 입 떠먹어보니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코코넛 향이 강하게 튀어나오지는 않았고, 달콤함도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한 밥에 살짝 단맛과 풍미가 더해진 느낌이었다. 돼지고기의 짭짤한 맛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단짠이라는 말이 딱 맞는 조합이었다.
이 한 접시의 가격은 22,000 콜롬비아 페소, 한화로 치면 7천 원 남짓이다. 관광지의 한 중심에 위치한 식당일뿐더러, 샐러드와 산코초까지 포함된 가격이라는 걸 생각하면 매력적인 가격이다. 괜히 사람들이 평일 낮에도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코넛 라이스는 내 소심한 도전에 기꺼이 호응해준 음식이었다. 별것 아닌 메뉴 하나를 주문한 것뿐인데, 작은 용기 하나가 괜히 여행을 조금 더 여행답게 만들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 세비체 (Ceviche)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인 여행기를 몇 개 찾아봤다. 사실 여행지 리뷰를 많이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카르타헤나는 정보가 많지 않아 몇 개라도 읽어보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 몇 안 되는 한국인 리뷰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던 길거리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세비체를 파는 작은 노점상이었다.
세비체는 생선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레몬이나 라임 같은 강하나 산성 과즙에 절여 익혀 먹는 중남미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익힌다기보다는 산으로 살짝 ‘익힌’ 해산물을 차갑게 먹는 요리에 가깝다.
구글맵에 찍힌 위치를 따라가 보니 길거리에 규모가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 노점이 하나 있었고, 관광객보다는 현지 사람들이 많이 앉아서 먹고 있었다. 조그만 주방 겸 카운터 앞에 크기 별 플라스틱 컵이 줄지어 있었고, 컵에는 가격으로 보이는 숫자들이 써 있었다. 주문하는 법을 알 방법이 없는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는데, 직원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고, 나는 곧장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휴대폰에 저장해 둔 새우 세비체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는 아까 본 줄지어 있던 컵을 가리키며 사이즈를 고르라는 듯 했고, 적당한 사이즈를 고른 나에게 그녀는 시크하게 빈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막상 받아본 새우 세비체는 생각보다 단순한 모습이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 안 가득히 소스에 버무려진 새우와 잘게 썬 양파, 고수, 그리고 크래커 한 봉지.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맛은 꽤 인상적이었다. 새우는 비린 맛이 거의 없고 탱글했고, 소스는 스위트 칠리 소스 같은 매콤달콤한 맛에 크리미한 느낌이 섞인 맛이다. 새콤하기만 한 세비체가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달달상큼한 맛이었다. 곁눈질로 본 현지인들이 먹는 것 처럼, 크래커 위에 새우를 하나 올려 한 입 가득 베어물면 바삭한 식감까지 더해져 손이 계속 가는 맛이었다.
엄청 고급 음식도 아니고, 대단한 요리도 아닌데 숨 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이름도 모르는 길거리 식당 앞에서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순간, 괜히 여행은 이런 맛이지 하며 순간에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곳을 찾아내는 한국인들의 정보력과 입맛에는 속으로 한 번 더 박수를 보냈다.
# 낯선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돌이켜보면 여행에서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단이라기보다, 그 나라와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새로운 나라에 가서 어떤 음식을 시도할 때는 늘 작은 망설임이 따라온다. 입에 맞지 않을까 봐, 괜히 주문했다가 돈과 한 끼를 날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같은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식을 하나씩 먹어보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세계가 또 여러 방향으로 넓어지는 느낌이 꽤 좋다.
카르타헤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관광지에 가까운 도시였다. 성곽 안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치안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고, 그래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로컬의 일상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아 조금의 아쉬움도 남는다. 파나마에 머물면서 떠난 첫 휴가인 만큼 기대가 컸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아마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