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기자의 DJ(김대중) 취재기] DJ, 네 번째 군산방문(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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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기자의 DJ(김대중) 취재기] DJ, 네 번째 군산방문(1986년 10월)
  • 조종안
  • 승인 2025.01.22 07:19
  • 기사수정 2025-01-22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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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공원 녹음연설
공안정국이 지속되던 1980년대 군산 중앙로 사거리
공안정국이 지속되던 1980년대 군산 중앙로 사거리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용공 조작 사건을 잇달아 발표, 공안정국을 조성하였다. 군산에서도 교육계 청년 지식인들을 간첩 이적행위 및 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몰아 처벌하는 용공 조작 사건 소식이 중앙 일간지에 대서특필된다. 1982년 교사, 직장인 등을 영장 없이 체포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여 조작된 진술을 받아냈던 ‘오송회 사건’이 그것이다.

그즈음 한국 사회는 기업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에게도 희생을 강요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로 인식되었고 노동 착취 등의 사회 부조리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에 의식화 교육이 필요성을 느낀 종교 및 사회단체들이 시민강좌를 통해 노동 강의를 진행했다. 나아가 청년 활동가들은 손이 미쳐 닿지 않는 노동 현장까지 뛰어들기를 시도했다.

군산의 노동자들도 권익 보호 운동에 동참하였다. 1986년 경암동 세풍합판 노동자들이 투쟁을 일으킨 것이다. 세풍합판 노동자들은 동종업계 중 최저 수준의 임금과 살인적인 12시간 맞교대 근무로 떨어지는 삶의 질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들고일어났던 것. 이 운동은 노동자의 인권 도모와 의식화에 목적을 두고 있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1980년대 초) 김대중(DJ)과 김영삼(YS)은 야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군부에 의해 제도권 정치 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YS와 DJ 진영은 전두환 독재에 저항하고 양 세력의 연대를 도모하는 한편 제도권 정치 진출의 가교로 민주화추진협의회(民主化推進協議會: 양·김 계열 인사들이 연합, 1984년 5월 18일 발족한 재야정치단체. 일명 ‘민추협’)를 조직한다. 민추협은 1986년 가을 현재 DJ와 YS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즈음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정보기관과 언론을 총동원, 내각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계는 내각제와 직선제 합의개헌(合意改憲)을 놓고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여당(민정당)은 의원내각제 개헌 관철을 주장하였고, 야당(신민당)은 대통령 중심 직선제와 사회 및 경제체제의 민주화, 언론자유 보장 등을 현안으로 내세웠다.

그해(1986) 10월 9일은 540돌 한글날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기념식 및 제5회 세종문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한편, 한글학회는 종로구 신문로 한글회관 강당에서 한글 운동 공로자에 대한 표창식을 가졌으며,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는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헌화식이 베풀어졌다.

# 군산 월명공원에서 녹음 연설

군산 옥외집회 현장(1986년 10월 10일 자-조선일보
군산 옥외집회 현장(1986년 10월 10일 자-조선일보

군산에서는 한글날(9일) 오후 2시 월명공원 수시탑 아래에서 이민우 신한민주당(신민당) 총재, 김영삼 고문 등 당 지도부와 1만 5천여 명의 시민-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군산·옥구 지구당(위원장 김봉욱) 단합대회 겸 직선제 개헌 추진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옥외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으나 신민당 측은 강행하였고, 참가자들의 함성은 월명산 줄기를 감아 돌았다.

군산 집회는 신민당이 국회 개헌특위(改憲特委) 활동 중단을 선언한 이후 처음 가진 장외 활동이었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오전 7시부터 경찰에 의해 자택에 연금되는 바람에 녹음 연설로 대신하였다. 신념에 찬 그의 목소리는 월명공원 자락을 타고 도선장 주변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정부와 여당에 모든 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해 눈길을 끌었다.

김대중 공동의장은 “현 대통령(전두환)의 남은 임기 1년 반 동안 여-야간 완전 합의에 의한 중립내각을 구성해 여기서 개헌(改憲) 문제는 물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 문제, 현행 모든 악법(惡法)의 민주적 개정 문제, 노동자와 농민, 서민 대중의 민생문제 등을 도맡아 해결하고 88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도록 하자”면서 “이 길만이 현재의 국민적 대립을 극복,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호소했다.-(1986년 10월 10일 치 ‘조선일보’)

김 공동의장은 “거국내각 구성은 국민적 불행을 막고 정치보복을 없애, 현 정권이 안전하게 야당으로 남는 길을 보장하는 난국 극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참가자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으며, 뜨거운 함성 소리는 월명공원 능선에 메아리쳤다.

# 시민은 평화적 시위, 경찰은 최루탄 발사

군산 옥외집회 강행 알리는 1986년 10월 9일 자-동아일보
군산 옥외집회 강행 알리는 1986년 10월 9일 자-동아일보

월명공원 단합대회는 빗줄기가 간간이 흩뿌리는 가운데 약 2시간 40분가량 진행됐다. 학생 및 청년 당원 400여 명은 대회가 끝난 뒤 김봉욱 위원장의 지역구 사무실까지 행진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대치,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학생과 청년 당원들은 공원 진입로 부근(군산상공회의소 앞)까지 진출하여 전경 300여 명과 대치했으며 일부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전두환 독재 타도!’, ‘대통령은 내 손으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서초등학교, 공회당, 군산시청, 군산우체국을 지나 군산경찰서 앞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서 오거리에 도착하자 경찰은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다연발 최루탄(지랄탄)을 쏘아댔고, 그 과정에서 시민과 학생 3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으며, 대학생 몇 명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경찰은 단합대회가 불법이라는 이유로 확성기를 통해 즉시 해산을 요구했고, 그중 100여 명은 10여 분 만에 전경들의 포위망을 뚫고 중앙로 1가 시청 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다시 2개 중대 병력의 전경들에 의해 차단되자 서서히 대열을 풀고 오후 5시 30분쯤부터 하나둘 귀가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이 추산한 시위 참가자는 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날 군산은 아침부터 경찰병력 44개 중대 6천여 명이 거리 곳곳에 포진하였고, 시청 앞에서 대회장(월명공원)에 이르는 4차선 도로(현 대학로와 중앙로 1가)에는 전경 5개 중대가 배치되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시위대는 주변 상인들까지 합세, 2~3만의 시민과 청년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이들은 ‘민주인사 사면 복권 즉각 단행!’, ‘김대중 선생 즉시 사면!’ 등의 구호를 함께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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