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에 이어)어느 땐 사는 게 지겨워 죽을 지경이라고 푸념하며 신세를 한탄했다. 지하철로 출근해 창고에 쑤셔 박혀 제품의 숫자만 종일 맞추다가 퇴근한다는 말도 했다. 약국에 종종 들르는 그는 진열장 앞에 서서 가끔 자신이 사는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 놓았으므로 유림은 잡다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올 때마다 충혈이 된 눈에 얼굴이 누렇게 떠서 우루사와 드링크제를 찾았다. 유림은 그의 회사가 어딘지, 무슨 제품에 코를 박고 하루를 흘려보내는지 모르지만 그가 술을 자주 마신다는 것은 안다.
그는 어젯밤에도 엉망으로 마신 모양이다. 술을 너무 마셔서 간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술이 그를 삼켜 버리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스럽다. 쓰러져 잠들었다가 간신히 깨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차림을 보니 아침부터 아내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모양이다. 아침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나왔을 그의 몰골에 언뜻 죽은 남편이 생각난다.
남편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결혼해서 살았던 한 달 동안에 무려 절반이 넘는 날을 술에 취해 귀가했다. 그것만 봐도 좋아했다고 말하기보다 잡혀 있었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인 유림이보다도 술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손님의 아내와 다르게유림은 남편의 술버릇에 짜증 내어 본 일이 없다. 취해서 귀가한 다음 날 죄지은 얼굴로 거듭거듭 사과하는 남편을 위해 유림은 서툰 솜씨로 정성껏 해장국을 끓였다. 몸을 염려해서 아는 상식의 약들을 모조리 복용시키기도 했다. 온갖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미리 가 버렸지만 말이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이 미안해서 손님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준다. 숙취에 정신이 흐린 표정으로 그도 덩달아 쑥스럽게 웃는다. 유림은 따뜻하게 데워진 드링크제의 병마개를 따서 우루사와 함께 내밀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속은 괜찮으냐고 묻고 싶지만 기계적으로 약만 건넨다. 그는 틀림없이 겸연쩍은 얼굴로 괜찮다고, 아직은 이상 없다고 답변할 것이다. 유림은 그런 상투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님이 요구대로 약을 판다.
가격을 묻지도 않고 그는 오백 원짜리 백동전 하나를 판매대 위에 놓고 나간다. 많이 사 먹어 본 탓에 가격도 훤하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또 남자 손님이 들어온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같은 것을 찾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술기운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약국을 찾는 이유는 짐작과 다르지 않다.
"속이 풀리는 약 좀 주세요."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인근의 여관에서 막 빠져나온 행색의 그는 주문 스타일도 똑같다. 방금 샤워한 듯 젖은 머리칼과 쭈뼛거리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주춤거리는 기색이다.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으나 초라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외박할 형편은 아닌 것 같다. 단칸 셋방에서 그를 기다리느라고 눈을 허옇게 뜨고, 밤을 지새운 아내가 있을지 모르고,학교에 가기 위해 손 벌리는 아이가 있는 가난한 가장일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힘들어 보이는 그가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요구한 것들을 건네준다. 게걸든 사람처럼 정제 한 알과 드링크제를 단숨에 치운 그가 빈 병을 들고, 버릴 곳을 찾는다. 두리번거리는 그에게서 말없이 병을 받아든 유림에게 그는 고맙다고 말한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다시 손해만 보던 남편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계속)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