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의 철제 새시 문을 연다. 기다렸던 것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던 안개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지독한 안개로 인해 그녀를 보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그녀가 등장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유림은 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드디어 그녀가 보인다. 안개 속 실루엣만으로도 한눈에 그녀임을 알수 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가게 앞을 지나칠 때, 조제실 옆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다. 나무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원형의 시계는 정확하게 일곱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 시간에 가게 앞을 통과하는 그녀는 비누로 씻어 갓 헹구어 낸 것 같은 맑은 얼굴이다.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찰랑이며 걸어가는 그녀에게선 향내가 물씬 풍겨져 나올 것 같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긴 부츠를 신은 잘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처럼 피돌기에 활력이 생긴다.
유림은 은빛 비늘처럼 싱싱한 그녀를 훔쳐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관음증 환자가 아닌데도 훔쳐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 그녀가 더없이 소중한 존재임에도 변태라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스럽다.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 쓸 때 그녀는 유림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생존의 이유였고 유일한 목표였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말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이유림, 성별/여자, 나이/45세, 직업/약사
간략하나마 신상을 밝히면 위와 같다.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가 실시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약사 면허증을 소지했다. 동네의 약국을 경영하는 중년 여자, 대한민국이 발급한 주민등록증이 있는 사람이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외형적인 요인 외에 유림은 고아나 다름없고, 결혼했지만 호적이 깨끗한 미혼의 독신녀이다.
유림에게 결혼이란 껄끄러운 단어로 잊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과거의 잔해일 뿐이다.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기억이 그렇지 못해 슬프다. 비인간적인 시집의 처사가 가혹한 상처로 남아서 가슴이 아프다. 남편이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죽지 않았더라면 그가 울타리가 되어 주었을까. 불행하게도 결혼하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남편은 저 세상으로 갔다. 그래서인지 가끔 결혼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호적에 아직 미혼으로 남은 때문이기도 하고, 결혼 생활이 너무 짧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떠날 것을 미리 예감하여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던 걸까,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한 달이 지나도록 미혼으로 남겨 두었다. 그의 늑장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고 부부의 연을 끊어 버린 관계라 사진마저 없었다면 누구도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집에서조차 완전한 타인으로 취급했으니 말이다.
남편과 함께 사고를 당했다. 그는 유림을 두고 혼자서 떠났다. 그의 죽음을 시집에서는 유림의 드센 팔자 탓으로 몰았다. 남편이 죽은 후 제일 힘들었던 게 그런 시집의 태도였다. (계속)
<알림> 매주 토요일 마다 연재해 온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이 갈수록 인기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들의 요청에 따라 김 작가의 단편소설을 토요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휴일에도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김선옥 작가의 소설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시는 시민 여러분들께 <투데이 군산>이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합니다.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