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골목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거나 끔찍한 괴물이 몰래 숨어 있다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노리며 덤벼드는 게 아닌가 싶게 무섭고, 으스스한 장소였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수상한 정적이 깊게 감도는 골목을 지나다가 흘낏 쳐다보면 대부분의 집들은 두꺼운 열쇠나 새시 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밤이 어슬렁거리며 눈짓을 시작했다. 절간처럼 죽은 듯 조용하던 골목은 자던 잠들을 일제히 떨쳐 버리고 기운차게 깨어났다.
가로등의 점등 시간처럼 눈을 뜬 골목은 저녁의 어스름한 기운을 폐부 깊숙이 들여마시고 그제야 하루의 문을 열었다. 골목이 문을 여는 시각이면 음험한 어둠도 왕성한 기운들을 가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낮 동안 굳게 철폐시켜 두었던 문을 열고 하나 둘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까지도 방 안에는 사내들이 떠날 때 남기고 간 비릿한 정액 냄새가 부유하며 떠돌고 있었다. 골목 안의 사람들은 공기 중에 남겨진 퀴퀴하고 이상한 냄새들과 살비듬, 머리칼이나 먼지 같은 것들을 밖으로 내몰거나 진공청소기로 부지런히 흡입해 없애면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그런 후면 골목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활기차게 솟구쳤다.
저녁은 또, 행상들과 화장품 외판원들, 보험 설계사들처럼 골목이 필요한 품목들을 움켜쥔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찾아오는 시각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하게 화장한 아주머니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두껍게 바른 화장발이 먹지 않은 아주머니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처진 어깨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었다.
"아이샤도우 가져왔어?"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화장한 여자가 껌을 딱딱 소리 내어 씹으며 아주머니에게 반말 투로 지껄였다.
화장품 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외판원 아주머니는 이마를 찡그렸다가 골목의 여자들이 중요한 고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환하게 얼굴을 폈다. 종일토록 방문판매로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은 상태지만 여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진하고 두껍게 화장해서 완전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여자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여자뿐이 아니라 그곳 여자들은 대부분 진한 메이크업 뒤로 숨어 낯선 얼굴들이 되었다. 눈썹을 진하게 그린 후에 기다란 속눈썹을 달고, 짙게 파운데이션을 칠한 여자들은 진한 색상의 립스틱을 마지막으로 손질을 마쳤다.
공들여 새로 만든 얼굴은 애인이나 가족들이 찾아오더라도 결코 알아볼 수 없었다.
전혀 미지의 인물이 된 그녀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어 하루를 살기 위해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에 떡칠하는지도 몰랐다.
"아! 지난번에 부탁한 청록색하고 흰색? 이번엔 틀림없이 가져왔지."
"잊지 않으셨네.”
"그럼, 두 번이나 부탁한 건데 어떻게 잊겠어? 회사에 물건이 늦게 내려와서 지난번에 못 가져왔을 뿐이야. 나는 손님이 말하는 거 잊을 정도로 그렇게 맹한 사람 아니야. 첫 거래지? 계속 거래해 보면 나를 잘 알게 될 거야. 오늘은 회사에 물건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빼 왔어. 중요한 고객이라 꼭 가져다 줘야 한다고 부장님께 사정해서 내가 직접 챙겨 왔거든. 그런 내 정성은 알아줘야 해"
이마의 잡힌 주름 속으로 두꺼운 파운데이션이 골을 이루어 주름이 더 굵게 보여지는 외판원 아주머니는 비굴하게 웃었다. 여자를 쫓아 숙소로 들어가는 외판원의 겨자색 반소매 티셔츠에 불빛이 피처럼 붉게 뿌려졌다.
골목 어귀에 서 있던 테이프 판매상은 여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외판원의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노총각이었다. 성이 노가여서 노총각으로 불리지만 실제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골목 사람들에게 늙지도 않았으면서 노총각이라고 가끔 놀림 당하는 그는 오래전, 여자가 골목에 얼굴을 나타낸 순간부터 여자를 짝사랑해 오고 있었다.
노총각은 화장품 외판원처럼 안으로 들어가 여자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방을 치장하며 사는지, 여자가 방에서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앞으로 여자가 몸을 파는 일 말고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장래에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지만 여자에게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끔씩 테이프를 고르는 여자의 얼굴을 닳도록 쳐다보면서도 그는 거래를 위한 다른 말을 여자에게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사랑은 가슴 안에서 키를 늘이고, 두께를 더해 갈 뿐 밖으로 품어지지 못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테이프들이 놓여 있는 나무판 위에서 가요 테이프 하나를 골라 휴대용 카세트에 집어넣고, 볼륨을 크게 키웠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경쾌한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깨춤을 들썩이게 흥을 일으키는 목소리는 리듬을 따라 골목 가득히 퍼져나갔다. 노래의 뒤를 이어 리어카에 각종 과일을 잔뜩 싣고 온 행상도 냅다 소리를 질렀다.
"싱싱하고 맛좋은 수박이 왔어요. 방울토마토, 물이 좋은 참외랑 복숭아도 왔어요. 황소 만한 금싸라기 수박이 단돈 삼천 원. 방울토마토는 한 보따리에 이천 원. 다들 나와보세요. 와! 싸다. 어서어서 동이 나기 전에 빨리들 사 가시요. 찬스 놓치면 맛없는 과일을 비싸게 사서 먹을팅게"
"말이 청산유수여"
지나가던 행인이 과일행상을 힐끗 쳐다본 후에 호기심이 잔뜩 서린 눈빛으로 골목길에 시선을 돌렸다.
“말 칭찬은 냅두고, 과일이나 많이 사쇼. 아참, 여그 골목 아가씨들도 내 과일이라면 무지하게 좋아하는디. 한 보따리 사들고 가시면 특별대우를 받지라."
과일장사가 능글맞게 웃으며 넉살을 부렸다. 이에 질세라 꽃을 파는 행상도 목소리에 힘을 실어 한껏 소리를 높였다.
"꽃도 왔어요. 아가씨들만은 못혀도 장미, 백합, 안개꽃. 이쁘고 잘난 꽃들이 없는 거 없이 몽땅 다 있어요."
테이프의 노총각이나 과일, 꽃을 파는 행상은 모두 비슷한 연배였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 소설은 매주 금요일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