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31] 대야의 찬란한 문화유산(1)… 마한·백제·고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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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31] 대야의 찬란한 문화유산(1)… 마한·백제·고려 등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7.09 18:27
  • 기사수정 2024-07-09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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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리 고분군… 마한의 생활· 분묘유적, 백제의 분묘유적 등 복합유적
무형문화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최갑선의 독경, 옥구 들노래
보탑정사의 탑동삼층석탑… 백제 양식 모방한 고려시대의 석탑
마한 백제시대의 복합고분군이 다수 발굴된 대야면 산월리 정상부근./ 사진=군산시청 제공
마한 백제시대의 복합고분군이 다수 발굴된 대야면 산월리 정상부근./ 사진=군산시청 제공

대야면을 걸으면서 꼭 다뤄져야 내용으로는 △ 문화유산 △ 일제강점기 유산 △ 대야를 대표하는 인물군 등이 아닐까 싶다.

대야란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대표적인 명칭은 ‘지경’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 예는 지경장과 지경역(옛 대야역) 등의 사례가 바로 그것을 방증한다 하겠다.

만경강 하구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넓은 평야의 중심에 있는 대야가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이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여기에다 군산대 주변 미룡동 유물산포지나 익산 웅포면 입점리 백제고분군 등과 하나의 띠처럼 연결된 대야 등지의 고분이나 유물의 출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였다.

군산시와 국가유산청이 오래전에 이런 엄청난 흔적이라 할수 있는 고고학적인 성과를 낸 것이다.

# 마백시대 복합유적의 산월리 고분군… 총 600여 점 유물 출토

1999년과 2001년 군산시와 군산대(박물관), 2002년 군산시와 국가유산청으로부터 발굴비를 지원 받아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세 차의 발굴조사에서 마한의 분구묘와 주거지, 백제의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 토광묘 등이 조사됐다.

마한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 백제의 분묘유적이 동일 유적에 자리하고 있는 복합유적이 발굴된 것.

마한부터 백제까지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에서 총 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 군산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해양문화의 역동성을 연구하는데 값진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줬다.

그리고 선사시대부터 줄곧 소금생산으로 융성했던 군산의 발전상과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방증해 주었다.

당시 필자도 도내 일간지의 J사에 근무하던 때였는데 산월리 유적군에 관심이 있어 이곳을 수차례나 다녀온 적이 있다.

2001년 2월 발표한 군산대박물관 조사단에 따르면 과학적인 연대측정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지만 마한 관련 고분은 4세기를 전후한 시기, 백제고분은 군산지역에서 횡혈식 석실분이 정형성이 띠기 이전의 과도기적인 단계에 해당하는 6세기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대야 산월리 고분군 조사에서는 장방형 분구묘 1기와 백제 횡혈식 석실분(굴모양 돌방무덤) 4기 등 모두 5기의 고분이 발굴됐으며 토기류 65점, 철기류 38점, 구슬류 190점 등 모두 300여점이 출토됐다.

출토된 유물 중 환두대도는 백제와 신라 등 삼국시대 고분에서 종종 발굴된 예가 있지만 석실분에서 발굴되는 것은 이례적인 사례였다.

여기에다 이곳에서 나온 토기류는 기종이 매우 다양하고 출토량이 많은 점에서 관심을 모았고서울 몽촌토성이나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을 제외하면 종래에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없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인 의미가 상당했다는 평가였다.

# 다양한 대야의 문화유산들

이곳에서 다뤄지는 대부분의 문화유산들은 탑동과 관련돼 있어 여기에서 종합, 정리했다.

▲ 죽산리 탑동삼층석탑 = 전군도로에서 임피면으로 넘어가는 중간부근에 있는 죽산리 탑동마을에 유서 깊은 석탑이 있다.

마을 앞에 탑천이 흘러 배산임수가 눈길을 끈 탑동삼층석탑은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전승기념으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백제양식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도유형문화재 제66호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옥개석 모두를 넓은 판석과 방대석을 이용하여 조성했다. 탑 전체의 높이는 약 6m이며 특히 넓은 판석으로 이루어진 옥개석은 팔수면이 아주 완만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건립한 것인지를 모른 석탑은 전설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 탑 안내판에는 1967년 문화방송에서 방영됐던 ‘전설따라 삼천리’ 설화를 적시하고 있다.

본래 청룡사란 사찰 이름에서 1991년 대웅전과 요사를 짓고 탑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보탑정사로 이름을 바꿔 달고 있다.

▲ 옥구들노래= 옥구들노래는 일련의 논매는 소리이며, 음악적으로 매우 오랜 형태의 선율과 리듬을 간직한 농요다.

/ 사진=군산시청 제공
/ 사진=군산시청 제공

 

옥구들노래를 할 때는 삼베로 지은 중의 적삼을 입고, 삿갓을 쓰며, 등에는 짚으로 만든 도롱이를 걸치고, 짚신을 신고, 풍장을 치며 만경산타령, 오호타령(방아타령), 자진산타령, 에얌소리, 등짐소리, 상사소리를 부른다.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 이어져 온 이 들노래는 1992년 소리꾼 고판덕(작고) 선생이 작고한 뒤 한 때 사라져 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옥구들노래는 1974년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았고, 1984년 ‘뿌리가 깊은 나무 팔도소리’ 음반에도 나왔다. 1993년에는 문화방송 한국민요대전에도 수록된 이 들노래는 2021년 JTV에서 진행하는 ‘신정일의 천년의 길’ 프로그램에 군산 ‘미소길’이 방영되면서 본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노래 계승발전에 누구보다 힘쓴 단체는 (사)아리울역사문화(대표 문정현).

이 단체는 2021년 동아리를 만들어 옥구들노래 발굴과 계승에 힘을 쏟으면서 이 노래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한두 명씩 힘을 모아 ‘군산옥구들노래보존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산옥구들노래보존회원들이 한 대회의 경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군산시청 제공
군산옥구들노래보존회원들이 한 대회의 경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군산시청 제공

특히 탑동마을 어르신들로 이뤄진 주민들도 옥구들노래를 살리자는 취지에 적극 동참해 노래 연습에 전념한 결과, 2022년 순창에서 개최한 전북들노래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최근에는 익산삼기농요보존회가 주최한 전국들소리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일궈냈다. 이후 군산옥구들노래보존회는 옥구들노래를 널리 알리고 저변확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독경(앉은굿)=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최갑선 선생의 전라북도 독경도 대야와 관련이 있다.

최 선생은 1952년 옥구읍의 무속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속생활이 몸에 배어 성장과정의 길·흉사가 항상 무굿과 함께 이어졌고 1969년 내림굿을 받았다.

이후 대야면 산월리에 기거하며 많은 전라도 독경 보유자들로부터 산경 15경, 대경 20경, 4가지 풀이등 전라도 독경 전편과 팔문 포함 설경 전편 제작을 전수받았다.

▲ 죽봉 고용집 선생= 탑동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돌아가신 조선후기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죽봉 고용집(1672~1735) 선생도 이곳과 떼려야 뗄수 없다.

그는 탑동마을에 있는 향리(鄕里)의 죽봉을 자신의 호로 쓰고, 서당을 세우고, 족보를 만들었다.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연못가에는 꽃을 심고 정자에 올라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효심이 대단하여 아버지 고필이 돌아가셨을 때 쓰신 만기부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죽봉집에 담았다.

조선 숙종부터 영조시대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문장가로 3권1책 209수의 한시, 수필, 축문, 편지글, 기행문을 포함하여 노론의 입장에서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 행장, 만장 등을 남겼다. 1938년 임피 월하리 영모재에서 후손들이 죽봉집을 편찬했고 2016년에는 한자로 된 죽봉집을 한글화 작업을 마치고 현재까지 3회에 결쳐서 학술대회를 개최된 바 있다.

선생의 묘소는 조선 후기의 대쪽 선비이자 명신이었던 면암 최익현선생이 찬술하여 비문을 쓰고 후손들이 세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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