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에 이어)
“이별을 이야기하는 거지. 언제까지 이런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는 거잖아."
“내가 첫사랑인 너를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지 모르니? 이별의 말을 스스럼없이 할 줄은 짐작도 못했어. 첫사랑의 깊이를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첫사랑을 강조하는 그는 과거에 목매달며 사는 듯이 여겨진다. 지나친 과거의 무게가 그로부터 내게 옮겨올까 봐 두렵다. 첫사랑이란 단어가 점점 짜증난다.
그러나 짜증난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다. 꽃뱀의 철칙이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첫사랑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이상한 종족이다.
"알아."
"알면서 내게 이런 식으로 아픔을 주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나는 이제야 간신히 너를 찾았어. 내 행복한 첫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느낌인데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하다니. 너무 잔인하다. 네 이야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어.“
“이별이 아픈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네 아내 영숙 씨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었어. 그래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겠어?"
그의 표정이 변한다. 아무리 부정해도 어쩔 수 없이 이별의 사실을 인정하는 눈치다. 나는 그에게 그의 아내의 등장이 필수가 되었다는 사실만 약간 들춘다. 말을 아끼는 것은 내 속셈을 보이기 싫어서다. 그녀는 내게 이별에 필요한 달콤한 낚싯밥을 던졌다.
"정당한 것, 옳은 것, 중요한 것, 그런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 첫사랑은 이 정도면 넉넉해. 아직도 무엇이 더 부족한 거야? 우린 너무 멀게 왔어. 이젠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 아내를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죄야. 우리의 관계를 알면서도 지켜본 네 아내가 참 대단하다. 괜찮은 사람이야. 기다리고 있을 때에 돌아가. 그게 현명하지."
나는 내가 만났던 남자들의 얼굴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 남자들의 아내를 만난 일이 없고, 설령 만났더라도 기억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쉽게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면에는 그의 아내가 있다.
그의 아내가 등장하여 내 목줄을 조이면서 미끼를 던졌다고 알리면 그는 어떤 표정일까.
소심한 그는 파랗게 질려서 기겁할 것이다.
“아내 이야기로 나를 더 이상 기죽이지 마. 쪽을 못 펴게 과분해서 힘들게 하는 여자니까.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내게는 흘러넘치거든. 내 삶의 풍요도 모두 아내의 덕택이야. 네게 베푼 친절도 아내가 제공한 풍요의 떡고물이었지. 나도 정말 한심한 작자란 거 알아."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다. 내 호사가 그의 아내의 힘이었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칼자루는 어차피 그의 아내가 쥐고 있다.
내겐 결정할 권한이 없다. 그녀 역시도 그가 나타난 것처럼 내게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웠다.
상실의 느낌은 아들 진수가 죽고, 남편의 곁을 뛰쳐나온 후에도 내게서 늘 떨어져 나가지 않는 얼룩이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인생은 재미없지만 살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게 내 인생이라면 수용해야 한다. 반항하면 인생의 무대에서 퇴출된다. 퇴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순응이 마땅하다.
그의 아내는 얼마 전에 내게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처럼 그녀도 내 이름 석 자를 똑똑하게 발음했다.
“장해원 씨죠? 저는 윤시영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내게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키워드를 사용했다. 그녀가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뻔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 첫 만남이던 호텔의 커피숍에서 나는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나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지만 그녀를 만나는 일은 어쩐지 캥겼다. 만나자마자 사람들 앞에서 쪽팔리게 망신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보다도 그녀에게서 듣게 될 말들이 더 염려가 되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치사한 짓은 못하는 성질이다.
그녀는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숍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의 당당한 모습만으로도 내가 만날 사람임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를 만날 때처럼 커피 향은 은은했고, 음악은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심각하지만 꿀릴 것이 없어 보였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좁은 이마가 품위는 없어 보였지만 허투루 행동할 인상은 아니었다.
머리채를 잡혀 동댕이쳐질 염려는 없었다. 처음 본 얼굴인데도 어디선가 만난 듯 낯이 익은 모습이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조심조심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주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앉으세요. 웃음이 참 아름답군요. 남편이 해원 씨에게 미련을 버리지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음성은 의외로 나긋나긋했다. 남편이 저지른 불륜 상대의 여자를 칭찬하는 아내란 드물다. 남편의 연인에게 보이는 인내는 쉽지 않은 여유였다. 그녀의 부드러움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세차게 찔렀다.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고 했어요. 입버릇처럼 되뇌던 첫사랑을 만났으니 그도 회포를 풀고 나면 정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지요. 은지 씨의 성향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끝낼 것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상당한 시기가 흘렀는데도 계속 이어지고 있더라고요. 은지 씨가 시기를 넘기고, 그이가 끈을 놓지 않는 사실을 보고,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요. 도를 넘기면 곤란하겠구나 싶어서만나자고 연락한 거예요."
그녀는 은밀할 정도로 조용하게 말했지만 내용은 내 전적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낌새였다.
해원이란 이름 대신에 은지란 가명을 들먹이는 것이 그랬다. 그녀의 단수는 보통을 넘었다. 내 정체가 들통난 마당에 구태여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도 그녀가 보이는 만큼은 침착할 수 있었다.
"아신다니 이야기가 한결 수월하겠군요. 시영이는 지금으로선 내 삶의 한 부분을 감당하지요. 그리고 시영이는 아직도 내 인생에 등장인물이되고 싶은 모양이고요.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논외이고, 살아남을 이유는 되죠. 나는 돈이 필요해요. 사람은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요. 감정은 내가 간섭하지 않는 영역이지요."
"계속 사기 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역겹고, 구차한 삶을 포장하지 마세요."
그녀는 야릇하게 웃으며 말 속에 뼈를 넣었다. 입에 올리기 고약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말투는 여전히 나긋나긋했다.
남편을 이용하고 있다는 내용에도 화내지 않는 그녀는 내게 휘두를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그녀와 대결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가진 카드를 다 보여 주기로 작심했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만 아니면 내겐 잃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 더 달란 뜻이지요. 아시겠지만 아직 다른 대상을 물색하지 못한 상태거든요."
나는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 뜻이라면 제가 그 대상을 추천해도 될까요? 영원히 놓지 않아도 될 만만한 대상이 있거든요. 어차피 대안이 필요할 테니까."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내놓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래까지 준비해서 잽싸게 펼쳐 보이는 콘셉트에 나는 아찔한 현기증이 솟았다. 그를 놓아주고 옮겨 갈 대상이 있다는 소식은 반가웠지만 영원히 놓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항은 썩 입맛이 당기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소속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한 곳에 매어서 인생을 꾸며 갈 자신이 없었다. 몸서리치게 지긋지긋한 경험으로 끝낸 남편의 소속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영원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요. 신뢰하지도 않고요."
"알아요. 하지만 해원 씨도 인생을 함부로 동댕이치지 않았으면 싶군요. 그동안 너무나 잘못 살아왔지요.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 같은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누군가에게 다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속죄란 말이 거부감을 일으키겠지만 잘못을 사죄하는 차원에서 내제의는 구미가 꽤 당길 듯싶은데.”
그녀는 은지란 이름 대신에 이젠 해원으로 불렀다. 나는 그녀가 내민 구미가 당기는 제의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 소설은 매주 금요일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수상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