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오늘 군산문화원에서 매년 개최해온 '군산 향토 문화 심포지엄'을 하면서 본인에게 사적으로는 증조부가 되시는 故매촌 정만채 선생과 조부가 되시는 故농암 정찬홍 선생을 기리는 시간을 갖게 되어 자손으로서, 군산시민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또한 문화원의 운영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저는 군산의 사학본산인 군산여자상업고교, 군산중앙여자중학교, 군산동중학교, 군산동고등학교, 군산가정기술고등학교 그리고 군산제일초등학교를 세우신 두 분의 노력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자손으로서 고인에 대해 발표하면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하려고 모든 기록과 전언을 통하여 노력하였으며 직접 보고 자란 저 개인의 인간적 관찰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주관적 견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제가 언급한 6개 학교를 관장하는 재단법인 동산학원은 1948년 7월 15일 자로 정부에 신청하여 당시 오천석 문교부장명의 문보 제241호에 의거 정만채 그리고 조계창 두 분의 이름으로 허가를 받았고 6개 학교를 실제로 설립하여 운영해 온 농암 정찬홍 선생은 1995년 12월 11일 전체 학교의 교육용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여 당시 전라북도교육청(교육감:문용주)의 협조아래 공립화가 되었으며 공립화 후에 자손들의 노력으로 1998년 4월 6일 매촌의숙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는 매촌의 손자 故정윤기 선생이 2대 이사장은 매촌의 증손인 제가 2010년 4월 6일부터 이제까지 맡아 보고 있으며 장학금은 총계 6억 8천 5백여만 원을 지역인재에게 수여해 왔습니다.
간단히 역사를 말씀드리고 이제 매촌 정만채 선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육영 사업가 매촌
매촌선생은 1884년 5월 27일 현 군산시 조촌동에서 하동 정씨 문성공파 26대 손으로 출생하여 유년시절부터 한문학을 수행하면서 가업인 농업에 전념하다가 1915년 자택에 매촌의숙을 설립하여 훈장을 초빙, 군산. 옥구지방의 청소년들을 모아 한문학을 전수 하시고 자신은 이들의 훈도에 전념하였습니다.
1920년 동광야학당을 신축하여 부근의 부녀자, 문맹청년, 유년들을 모아 한글 교육에 몰두하였으며, 1926년 일정의 탄압에 의하여 야학당을 강제 폐교당하고 춘궁기 가난한 농민에 식량을 급여하여 빈농구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0일 전 재산을 투입, 동산학원을 설립하시었으며, 1955년 군산시사회를 설립, 회장으로서 이 지역 한시의 육성발전 및 보급에 크게 기여하시게 됩니다.
또한 1960년대는 군산경노원 회장으로서 경노사업 추진 및 경노사상 앙양에 진력하시다가 1961년 9월 1일 78세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고, 첫째아들은 동산학원 설립 후 6개 학교의 실제 운영자였던 故정찬홍 옹, 둘째아들은 동산학원 설립 후 학교경영의 재무를 책임진 배재학당 시절 독립투사 故정찬구 옹, 셋째아들은 개인사업을 한 故정찬규 이시고, 딸 첫째는 군산 동인제약의 故신언기 회장의 부인이신 정정애, 둘째는 前 군산시장 故최봉채 옹의 부인이신 정영애, 셋째는 前 전북도 교육감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故설인수 옹의 부인이신 정경애 여사입니다.
故人은 127수의 주옥같은 한시를 남기셨습니다.
이에 후손들이 매촌의숙 장학재단을 중심으로 매촌 한시사를 1999년 10월 본인이 발간위원장을 맡아 발간하였습니다.
이제는 매촌 정만채 선생의 업적이라고 할까요?. 공적인 활동을 더 상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47년부터 1998년까지 50여 년 동안 6개 사립학교로 지역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동산학원이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공립학교입니다.
산하에는 이미 열거한 군산제일국민학교, 군산중앙여중, 군산동중, 군산여상, 군산동고 그리고 군산여자고등기술학교까지 10만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한 대가족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 학교의 산모이자 설립자인 매촌 정만채 선생에 대하여 살펴보는 일은 자손이 아니더라도 교육자로서 지극히 당연하며 이 고장의 문화발전이나 한국의 교육사상에 보탬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매촌 선생은 고종 21년 당시 옥구현 북면 조촌리(현 군산시 조촌동)에서 토호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5-6세에 한학에 입문, 그 문재(文才)가 탁월하였음은 뒷날 남긴 많은 한시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10세 전후하여 가뜩이나 호방한 성품에다 감수성이 많은 소년으로서 무엇을 보고 느끼었을까? 1894년 나라에서는 일본을 거쳐 상륙한 개화풍이 갑오경장이라는 이름으로 술렁이고, 바로 이웃 고부에서는 정월부터 동학란이 일어 불안하기 짝이 없을 뿐이 아니라 이를 진압한다고 일본군인을 불러들이니 그 설치는 총 · 칼 아래서 그들을 우리는 수비대라고 불러서 무서움 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해 7월에는 청 · 일 전쟁이 일어나 대국이 소국한테 패배하는 엄청난 일이 생겼으며, 다음 해 1895년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되고, 국모인 민비가 그것도 궁중에서 일본인에게 시해되니 세상은 분간하기 어려운 요지경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뿐이랴, 유림 선비에게는 상상도 못 할 단발령이 내려 상투를 깎으라 하고 위로는 왕부터 복장이 양복으로 바뀌고 오랜 습성으로 몸에 밴 음력을 폐지하여 양력을 채택하는 등 정치 · 경제면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문화 · 사상면에서는 대혼란을 초래했으며 국내 정세는 물론 국제정세에 눈이 밝은 지도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강식약육의 거센 물결속에 국권은 풍전등화 격이었으니 백성들의 가난과 무지만이 남아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정만채 선생이 학문을 가까이하여 옥산에 있는 염의서원이나 이웃 아산리에 있는 낙영당 등에서 연재 송병준 선생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보았어도 우국과 개탄으로 얼룩진 답답한 나날은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경향각지에 서구적 신학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지고, 이웃인 구암리에는 미국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의 포교를 겸하여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지금 영광여자중 · 고교)가 세워졌으나 이미 처자가 있고 대대로 유학사상에 젖은 유림으로서 선뜻 신학문에 나설 나이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그 신학문이 일본인의 침략행위와 더불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향교 · 서원 · 서당을 버리고 보통학교에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상투를 깎는다는 일이 일종의 배반행위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고루한 생각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905년 미국의 Taft 육군장관과 일본의 Katsura 수상 간에 비밀 협정이 맺어지고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을 내세워 이미 개항된 군산일대에는 일본인이 밀려들어오고,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했으니, 한국인은 그 생명과 재산을 지탱하기 위하여 가진 곤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급기야 1910년 일본은 한일합방이라는 명목으로 이 땅을 식민지화하여 우리 민족을 그들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 이 민족은 그들의 총·칼 아래에서 숨조차 크게 못 쉬는 죽은 목숨으로 보였던 것이며 이미 부모와 처자를 거느리고 있던 정만채 선생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커다란 충격은 한민족의 삼·일운동이었어요.(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다 죽은 줄 알았던 한민족의 어디에 무엇이 숨어 있기에 맨주먹으로 그들의 총칼을 마다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엄연한 자주독립국임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바로 이웃인 영명학교 및 멜본딘 여학교 교사들과 그 제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일본 헌병과 경찰에 대항할 수 있었고, 군산일대에 살고 있던 일본인을 벌벌 떨게 하는 힘이 무엇이었던가를 곰곰이 뇌이게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한국이 일본에게 먹힌 이유가 가난과 무지에 있었고, 이제라도 그것을 벗어나려면 새 시대에 맞는 교육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단안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제는 물론 손자까지도 신학문에 종사토록 하되 그 교육을 학교에게만 맡기지 말고, 가정교육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바로 自主, 自立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가정교육상황을 그 손자인 정윤기 초대 매촌의숙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동경유학에서 돌아오면 딱 사흘간 쉬게 한 다음 들로 내쫓습니다. 놉(일군)들과 함께 김을 매게 하지요. 요즘같이 무슨 바캉스가 있는 줄 압니까. 그래서 쟁기질 · 낫질 · 호미질 · 다 잘합니다. 조부님은 우리들을 이렇게 교육시켰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이삭줍기의 例)
여기서 우리는 많은 암시를 아니 받을 수 없습니다. 이에는 돈 자랑 할려고 동경까지 유학을 시킨 것이 아니라는 무언의 교훈과 돈이 없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많은 이웃 자녀에 대한 교육도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봅니다.
또한 그가 가장 안타까이 여겼던 일은 삼·일운동 이후 군산시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지만, 교육면에 있어서 한국인과 그 차별대우가 극심했던 것입니다.
첫째, 일본인이 교육받을 기회는 얼마든지 열리어 있어 심지어 1920년대에는 군산중학· 군산여고 등을 세워 자기네들의 자녀 교육기관으로 쓸 뿐이고, 한국인을 위해서는 군산보통학교와 1-2년 단기적으로 양성하여 머슴처럼 부리는 군산상업보수학교 정도였으니 말이요. 심지어는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던 한국인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인 멜본딘여학교와 영명학교는 삼·일 봉기 운동을 구실로 문을 강제로 닫게 했으므로 당시 상황은 짐작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만채 선생의 신념은 조금씩 굳어가기 마련이었습니다.
즉, 우리네 주변에 무수히 깔려있는 가난과 무지를 극복하고 어엿한 민족국가를 되찾으려면 한국의 젊은이에게 힘을 갖도록 해야 하고, 그 힘은 앎과 독립자주정신에 입각한 실천이라고···
여기서 정만채 선생이 지닌 교육입국정신의 뿌리가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동산학원 창립
1945년 10월 어느 날 군산시 조촌동 어느 조촐한 방에서 몇 명의 뜻있는 인사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무렵이었어요. 징용, 징병, 학병, 여자를 제물로 삼는 정신대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금 · 은 · 놋쇠 · 쌀 · 보리 ·밀 등의 공출에서 해방되었으니 말입니다. 어찌 그뿐이랴, 강요되었던 일본말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쓸 수 있는 해방! 더구나 군산일대 일본인의 나막신(게따)소리가 가장 높았던 고장이요, 그들의 수탈에 못 이겨 북간도로 유랑길을 떠난 백성이 그 얼마였던가?
살림살이는 이미 그들 때문에 바닥이 났어도 흩어진 가족을 기다리는 부모와 처자의 기대로 술렁이었고 대부분의 가족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편 연합군인 미국군인이 진주하여 일본인 학교였던 군산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되고 그 사나웠던 일본군인은 포로수용소에서 노예처럼 상냥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는 미군을 따라 다니는 어린이의 “Hello”, “OK” 소리에 내던져지는 껌조각···
이렇게 한국인의 희비가 엇갈린 속에서 더욱 심각하게 노출된 현상은 정치적 · 경제적 혼란이었습니다.
알맹이도 없는 감투싸움에 생기는 것은 정당이요, 헐벗은 사람들은 일본인이 버리고 간 가재와 집등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이었습니다.
잔인한 착취와 침략이 할퀴고 간 이 땅의 현실은 그토록 처절했으며 이러한 혼란과 환희가 뒤범벅이 되어 있을 때, 군산시내 몇 명의 유지들은 저 나름대로의 애국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바로 동산학원을 만들기 위한 최초의 회합이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는 저마다의 애국론을 집약 「교육보국」 과 「교육입국」 으로 흐트러진 국가의 안정을 찾자는 것이 중요한 논제가 되어 있었으며 이 가운데서도 매촌 정만채 선생은 「교육보국」과 「교육입국」 의 강한 신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35년이란 일제의 오랜 질곡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야 했던 그 슬픔도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의 무지로부터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온 그에게는 이 「교육입국」 과 「교육보국」이 곧 그가 내세우는 애국의 이념이자 철저한 신념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웅지가 일찍부터 그의 가슴속에 싹텄기에 그는 이 자리에서 마침내 설립자로서 그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입니다.
「교육보국」 과 「교육입국」 으로 흩어진 국가의 대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급기야 모든 사재를 털어 육영사업에 쾌척함으로써 그 생애의 가장 바람직한 일로 결행했던 것이며 그가 쾌척한 재산은 약 1천여석, 큰 재산가가 많은 재산 가운데서 일부분을 쾌척하는 그러한 쾌척이라기보다 매촌선생에게는 한 뼘의 땅마저도 몽땅 털어 바쳐 명실상부 모든 재산을 오직 이 동산학원을 위해 다 바쳤던 것입니다. 1945년 10월, 일인이 경영하던 가정여학교를 인수해서 햇병아리 같은 고고의 소리를 울린 것이 동산학원의 첫출발이었습니다.
1천여석을 쾌척하고 겨우 가정학교를 인수, 새 출발을 한 매촌선생은 그 무렵 주위에서 많은 비웃음을 받았다는 것이예요. 그것은 개척기에 있는 한국 사학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였거니와 그만한 재산으로 겨우 초라한 가정여학교라는게 가소로웠다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촌선생은 그러한 비웃음에 귀가 갈 리가 없었으며 오직 그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소신과 그의 강직한 집념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몇 배의 용기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군산 동산학원이 매촌 선생의 그러한 강직과 투철한 신념이 똑바로 세워져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1949년 4월 26일 당초 발판을 디디고 선 가정여학교가 발전적 폐교를 하고, 군산여자상업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군산에서는 최초로 여자 실업학교로 출발을 할 때 매촌선생에게 있어 그 감격은 말할 수 없이 컸었습니다.
그것은 시험대 위에 섰던 사학의 성공이라는 어려운 난제를 넘었다는 그것보다는 그의 꾸준한 집념의 승리에 대한 쾌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매촌선생은 이렇듯 설립자로서 학교를 그의 생명처럼 아꼈으면서도 학교의 교주로서 행세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애당초 동산학원의 설립인가를 낼 때 교주로서 매촌선생이 모든 학교재단을 자기 명의로 하지 않고, 공유의 형식으로 처리한 것이랄지 또 학교에 자신이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고 오로지 공적인 절차에 의해서만이 학교일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그의 청렴과 결백, 그리고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동산학원이 설립된 지 어언 수십 년, 한 개인으로 말하자면 장년기에 접어들어 한참 일을 할 나이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설립자로서 점화 구실을 한 정만채 선생의 뜻을 이은 교육자이자 교육행정가인 아들 정찬홍교장 선생의 피땀 어린 노력과 그 학원의 이사진 및 교직원 일동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정이라 할 것입니다.
3. 한 학자로서의 매촌선생
어려서부터 한학으로 글을 읽힌 매촌선생은 청년시절에 이미 한시에 뛰어나 이곳 군산 옥구지역에서 일찍 군산시사를 조직하고 지방문단의 개발에 앞장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성이 낭만적이어서 문학을 즐겨 했다는 그는 한시분야에는 이 지방에서 거의 독보적인 경지에 있었고, 군산 옥구의 한시는 오직 그로 인해서 개척 · 보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군산은 원래 바다를 낀 도시이긴 하지만 어느 도시보다도 정서가 메마른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메마른 군산에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매촌선생의 뜻이었습니다. 그가 군산에서 군산시사를 창설하고 스스로 그 단체를 영도하고 나선 것도 그 자신의 정서생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군산사회의 정서생활 높이기에 보다 더 큰 뜻을 둔 것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前 군산문화원장 이병훈)
이미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인륜의 높은 경지를 터득한 그가 박학통문으로 이곳에서 인격적으로나 또는 학문적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전에 남긴 1백 수십여 편에 걸친 시는 그의 이러한 박학을 더욱 뒷받침 합니다.
매촌선생을 잘 아는 군산의 어느 시인은 「매촌이 남긴 1백 수십 편의 시는 그 무렵 전라도에서는 보기 드문 시들이며 그의 시는 한마디로 그 인간의 박학을 말해 주거니와 그의 천성적인 서정을 보다 많이 풍기게 하는 것」 이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매촌선생을 가리켜 군산이 낳은 천생의 서정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가 발표한 1백 수십 편의 시는 한결같이 그의 폭넓은 인간성과 풍만한 정서를 풍겨주고 있는데 그와 같은 인간성과 정서가 그로 하여금 나중에 육영사업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게 한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연 그는 그의 생애를 시와 더불어 살아왔으며 그의 시심과 숭고한 시의 세계는 그 자신의 인간을 승화시키고 미화시키는데 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그의 인간을 대별해서 두 개로 나눈다면 꿈 많았던 청년시절 이후는 그의 창작생활을 들 수 있으며, 그 이후를 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심열을 쏟은 육영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매촌선생의 육영사업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의 인자한 성격에 의해 일찍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지만, 그는 이 사업에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모든 심열을 쏟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매촌선생은 말년에 군산시 조촌동 생가에서 증손자들이 커감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시다가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인 1961년 9월 1일 78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매촌선생의 장례식에는 당시의 동산학원 학생들이 총원 참여했으며 상여행렬은 조촌동에서 백석리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는 기억합니다.
마지막으로 매촌 한시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낭독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하늘이 맑게 개인 바닷가 마을 매촌
조용히 생각에 잠기려 골돌에 휩싸인다
어버이를 사모함에는 선조를 받드는 것에 우선하고
자식을 가르침에는 후사를 계승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뜬 인생 구름같아 청춘은 지나가고
부질없는 세상일에 백발만 남았구나
이 날만 되면 시름 잊는 술 마시며
너울거리며 춤을 추다가 석양을 맞는다
감사합니다.
※참고
① 전북매일(1969. 3. 9.) 명문의 고향
② 한국문본 신풍토기(1981. 8. 1.)
③ 전북도정신문(전북인물열전) 제76호(1996. 10. 1.)
④ 매촌한시사(199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