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鄕… 춘고 이인식, 문형모, 이기준, 강한년, 심재순 애국지사 등 다수
고건 전 총리… 최연소 전남지사, 서울시장 2차례, 대학총장, 대통령권한대행 등
예로부터 너른 평야와 교통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했던 고장, 임피지역에는 시대마다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조선시대는 물론 근·현대기 군산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문학인, 예술인들 중 상당수는 이곳 출신이다.
특히 구한말 의병투쟁부터 만세운동, 소작쟁의 등 항일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 유명 정치인 및 행정관료들
임피를 빛낸 인사 중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로는 고형곤· 고건 부자가 아닐까 싶다.
고형곤(고인) 전 전북대총장.
고 전총장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한 한국 서양철학 1세대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고 전 총장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연세대와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전북대 총장(59년)을 거쳐 63년에 군산· 옥구지역에서 당시 야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정책위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냈다. 정계은퇴 후 말년엔 내장산의 한 사찰에서 칩거하면서 철학 공부와 연구에 매진했다.
고 전총장은 3남 2녀를 뒀는데 두 아들을 전국적인 인물로 키웠다.
3남이 고건 전 총리는 본적이 임피면 월하리로 강원지사와 전남지사, 교통부장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거쳐 85년 민정당 후보로 군산·옥구지역에서 12대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내무부 장관(87년)과 서울시장 2차례, 명지대 총장(94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등을 거쳐 2003년에 35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고 전총리 명성에 가려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큰형인 고석윤 변호사는 전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상공부 상역국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직, 오랫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
고형곤 박사와 고건 전총리 등과 비견할 수는 없지만 임피출신으로 해방 직후 널리 알려진 인사들이 상당하다.
이승만 전대통령과 장면 박사 등과 친교한 전북지사와 전남지사를 지낸 관료들은 물론 지역에서 3선을 지낸 국회의원 등도 있다.
이용택(고인) 전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은 수원고등농림학교 동기인 장면 선생과 함께 야당에 소속되어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60년 4.19 이후에 전북지사로 취임했으며,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지냈다.
이을식(고인) 전 전남지사는 1951년부터 53년까지 제3대 지사를 지내면서 오늘날의 전남대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당시 이 지사는 전남도립대 설립을 추진했으나 전남도의회에서는 정부의 예산지원이 없다며 사흘 동안이나 반대했지만 2세 교육의 필요성을 도의회에 간곡히 호소해 의원 만장일치로 전남대 설립안을 가결시켰다.
1906년 임피초등학교(옛 보흥학교)에 입학했다. 해방후 이승만 전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행사에도 자주 참여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전라남도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군산 최초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채영석(고인) 전 의원은 조선일보 정치부기자 출신으로 민추협 대변인과 평민당 수석부총무, 국회보건복지위원장 등을 지냈다.
여기에다 범임피 출신으로 알려진 인사 중에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있다. 채 전총장은 부모세대가 임피면의 경계지역인 대야 탑동마을에 살다가 서울로 떠난 경우다.
이밖에 권형신 전시장은 관선 군산시장과 남원군수, 내무부 재경국장, 한국소방검정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 애국지사 다수 배출
임피는 과거 군산을 대표하는 지역이라는 이력 때문인지 몰라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항일애국운동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그중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이인식 선생(고인).
이 선생은 1901년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3.1만세 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돼 옥살이를 했으며, 일본 동양대학에서 수학 중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했다.
그후 전답을 팔아 상해 임시정부에 당시 8,000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했으며, 독립 후에는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월명공원에 동상이 있다.
독립운동에 매진한 인사 중 눈에 띈 이는 문형모(1875 ~ 1952) 애국지사다.
문 지사는 임피면 월하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박이환과 함께 태인(泰仁)으로 온 최익현의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군대해산이 있자, 박이환과 해산된 군대를 모아 의군을 조직, 의병장 이홍규의 의진(義陣)에 들어가 진안, 장수, 금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1914년에는 고종의 밀명(密命)으로 임병찬 선생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호남통신국장을 맡았다.
1918년 대동(大同)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들어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 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아서 보냈다.
1967년 지방 유림에서 그의 고향에 의사우당문선생유적비(義士愚堂文先生遺蹟碑)를 세웠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임피출신 이기준 애국지사는 1905년 을사조약과 외교권 박탈을 당하자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했다.
1909년 5월 이웃 용안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던 중 용안주재소 및 강경경찰서 일본 순사들의 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전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한년 애국지사는 1880년 12월 17일 임피면 읍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 처남 배헌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학교가 극심한 재정난에 처하게 되자, 1914년 가을 배헌과 함께 귀국하여 옥구에 있는 그의 유산 중 500석 토지를 처분하여 신흥학교의 재정을 도왔다.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후 신흥무관학교 학우단 재정부장을 맡아 학교 운영에 진력했으며, 북로군정서에 소속되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만주에서 계속 활동하던 그는 1940년 4월 20일 하얼빈 적십자병원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86년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영명학교(군산제일고 전신)와 임피초교를 졸업한 출신 심재순(1899~ 1939) 애국지사는 1927년 서수면에 있던 일본인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일본 동경에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하여 국내로 발송했다.
또한 1930년 9월 고향 군산으로 돌아와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1931년 8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밖에도 옥구농민항쟁에도 임피와 서수출신의 항일지사들이 다수 참여했고 임피장날 1919년 3.1만세 운동에도 앞장, 다수의 애국지사들의 고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