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도농통합 후 군산시 임피면… 총 7개리 39개 마을로 구성
옛 교육기관인 향교에 이어 초·중교- 대학 등 위치한 교육의 메카
임피면은 남산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읍내, 축산, 미원리가 있고, 남으로는 보석, 술산, 월하, 영창리가 있는데 총 7개리 39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임피면은 본래 백제 시산군의 일부로, 피산, 흔문, 소도, 실소출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와서 군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 ‘현’으로, 조선 말에는 다시 ‘군’으로 부르게 됐다.
임피 및 옥구는 동국여지승람에 임피는 고사재라 했고, 옥구는 마슬이라 하여 일본과 왕래하는 요로에 위치했다.
백강의 포구인 군산 일대는 기벌포라 하여 경계하고 진호하는 포구를 의미하였고 임피라는 명칭은 삼국통일 후 완산주 설치와 더불어 한자 이름으로 바뀌었다.
임피군은 옛 지명으로 현내· 동일· 동이· 남일· 남이· 남삼· 남사· 서삼· 북일· 상북· 하북· 북삼으로 불리었는데 임피면은 임피군의 한 지역으로 임피 읍내가 있다고 해서 현내면이라 불렸다.
1914년 군· 면 통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임피면은 남일면· 남이면· 동이면의 각 일부와 익산군 일부와 병합해 7개리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피면의 연원에 대한 군산시 임피면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
임피면은 오늘날에는 국도 27호선, 지방도 711, 718호선이 교차하는 지역으로 익산 등 사통팔달 교통의 분기점이며 군산 동부권의 축을 이루는 경제권의 중심지이다.
임피(臨陂)란 지명도 시간을 거꾸로 돌려야만 알 수 있는 지명.
임피는 바닷물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둑이 있었던 데서 유래됐는데 본래 임피역 승강장 앞 평야는 과거 갯벌이었단다.
호남평야의 중앙에 있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간척, 오늘날과 같은 논으로 바뀌었다고.
일제강점기에 만경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포구를 낀 너른 강변지역으로 땅이 비옥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익산시 오산면과 군산의 대야· 성산· 나포· 서수 등과 인접해 있는 임피면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교 등이 있는 이례적인 곳으로 한때 현(縣)이 존재할 정도로 옛 군산의 중심공간 중 하나였다.
임피지역은 오래전부터 교육 및 행정 중심지답게 교육기관인 임피향교가 세워져 임피지역에는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왕성한 곳이었다.
이런 전통을 계승이라도 하듯 다양한 교육기관이 존재했고, 높은 교육열과 풍요의 고장의 특성을 살려 근현대사의 유명 인물들이 배출됐다.
이곳 출신으로 유명인사로는 고형곤(전 전북대총장), 고건(전 국무총리) 등과 문화예술계 낭곡 최석환(미술), 채만식(문학), 부모의 고향인 황병기(음악) 등이 있다.
얼마전, 불볕더위 등을 이유로 늦춰진 ‘군산을걷다’ 시리즈물을 취재하기 위해 임피소재지를 들렀다. 그 핵심적인 공간은 임피향교와 임피현령 및 유생들의 위패를 모신 노성당, 연지쉼터의 팔성정, 옛 우물, 인근 학교들, 백릉의 생가지 등이다.
# 임피향교와 노성당
옛 동헌은 사라졌지만 지방국립교육기관이었던 임피향교를 방문하기 위해 연못을 들렀는데 연지쉼터에는 배롱나무 및 왕버들나무 등이 군락을 이뤘다. 그 주변에는 다양한 비석들이 띠를 두르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약 20~ 30기가 우리를 환영하듯 서 있었다.
그곳에는 동네 주변을 알기 쉽게 설명이라도 할 것처럼 소박한 마을 안내도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향교와 담을 같이하는 대성중학교, 유서 깊은 임피초등학교로 향하는 곳곳에는 은행나무, 오동나무, 왕버들나무, 배롱나무 등 수백 년 된 거목들이 오랜 기간 위세등등했던 임피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향교로 향하는 곳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는데 동헌이 있었던 곳은 임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임피향교
군산지역의 대표적인 조선 시대 교육 기관.
1403년(태종 3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됐다.
임피향교는 1403년에 임피면 축산리 교동에 처음 건립하였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0년(인조 8)에 이전 및 중건했다.
1710년(숙종 3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고 1974년에 대성전을 보수하고 1975년에 명륜당, 1976년에 부속 건물을 보수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명륜당, 동재· 서재· 흥학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대성전 중앙에 공자를 비롯한 5성(五聖), 송조 4현(宋朝 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함께 모셨으며 경내에 단군사당과 최치원 영정을 모시고 있는 점이 특색.
이곳의 대성전은 1984년 4월 1일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제95호로 지정됐다.
임피향교는 중요 역할인 제향 기능과 각종 대제 행사를 진행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과 유아, 초· 중·고생 등을 대상으로 향교의 제 기능인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노성당(老星堂)
임피향교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기와집들은 노성당. 이곳은 임피 유생들이 역대 수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990년 6월 30일 전라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됐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디딤돌로 사용되는 돌 중에 탑의 일부분으로 쓰이던 부재 2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향교의 부속건물 중에서도 주춧돌로 옥개석 1개가 사용됐다.
주변 가옥에서도 옥개석의 일부를 주춧돌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임피읍지에 5층 석탑과 4층 석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기록을 확인해 주고 있다.
정원에는 2구의 문인석이 있는데 일반적인 형태와 거의 비슷하나 눈 부분을 튀어나오게 조각하여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한편, 연지(蓮池) 쉼터는 임피 현청의 부속 건물로 역대 수령들이 왕버들나무로 우거진 연지 주변을 돌며 애민선정과 여민동락을 생각하던 곳이다. 이곳에 있는 팔성정은 2004년 신축, 오늘에 이르고 있고 주변에는 역대 현령들의 공덕비가 다수 있다.
※채만식 생가지와 묘비
성내에서 면사무소와 파출소로 향하는 큰길 주변에는 우리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백릉 채만식의 생가지가 있는데 옛집은 사라지고 우물과 비석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임피면사무소의 소재지에 이를 수 있다. 지서 앞에 그의 생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을 넓히기 위해서 헐리고 없다.
‘소설가 채만식 선생 생가터’(1986. 11월 세움)의 푯돌이 이를 알려 줄 뿐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서상마을 길로 들어서면 늙은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는 연못이 있고, 그 윗켠에는 그가 다녔다는 임피 보통학교(지금은 임피초교)가 자리하고 있다. 제법 규모 있었던 학교였다.
임피파출소 앞에 다시 1km쯤 떨어진 축산마을이라는 푯말이 있는 계남마을 야산에 가면 백릉의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1959년 소설가 이무영(李無影)이 쓴 짤막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소에서 가까운 곳엔 한때 백릉이 살았다는 집도 있으나 현재 폐가처럼 변해 있다.
백릉은 6·25 발발 2주 전인 6월 11일, 익산시 마동에서 노년성 폐환으로 죽음을 맞았고,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계남마을의 산기슭 무덤에 고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