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8] 영명학교를 항일학교로 키운 교사·선교사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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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8] 영명학교를 항일학교로 키운 교사·선교사들(4)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7.13 13:26
  • 기사수정 2023-07-13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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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사들…이두열· 김수영 지사, 김인전 임정 의정원 의장
전킨· 불 등 선교사, 영명학교 기틀 마련· 근대사상 고취 등에 앞장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등 한국독립운동 실체 미국 언론 알려
(좌측부터)독립지사 이두열 선생-전킨 선교사-옛 군산영명학교 교장 윌리엄 리튼/사진 출처=국가보훈처 및 전킨 기념사업회
(좌측부터)독립지사 이두열 선생-전킨 선교사-옛 군산영명학교 교장 윌리엄 리튼/사진 출처=국가보훈처 및 전킨 기념사업회

영명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이 학교의 교사나 교장으로 근무한 인사들 중에는 항일운동은 물론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들의 헌신적인 교육은 근대정신으로 무장, 항일운동과 신학문 전파 등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영명학교의 교사 및 교장들은 항일투쟁과 독립정신의 고양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다.

특히 눈길을 끈 이들 중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 항일운동에 헌신한 영명학교 교사들

호남 최초로 군산 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학생들도 앞장섰지만 이 학교와 이곳에서 근무했던 교사들의 민족교육 등도 큰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훈처가 이런 공적을 기려 영명학교 교사였던 이두열 선생 등 4명을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중에는 영명학교 이두열· 김수영 교사 등과 이곳에서 교육선교에 힘썼던 윌리엄 린튼 교장 등 은 호남지역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을 이끌어 낸 주역들.

이들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 이어 호남지역 최초의 3.5만세운동을 이끌어 냈다.

당시 이두열 선생 등 4명이 이끈 만세운동에는 3만7,000여명이 동참했으며, 사망 및 부상자 등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군산 3.5만세운동을 계기로 그해 5월까지 전북지역 곳곳에서는 28회에 걸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두열 선생(1888~1954)은 3월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학생들과 영명학교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인쇄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해나갔다.

하지만 거사 직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의 급습해 이두열 선생과 학생들을 체포· 연행하면서 계획한 거사가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남아있던 학생간부 등이 3월6일로 예정돼있던 만세운동을 3월5일로 앞당겨 진행했다. 거리에 있던 수많은 인파가 대열에 합세해 체포된 이두열 교사들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했다.

함경남도 영흥출신 이두열 선생은 1919년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군산 3·5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원하며 만세 당일 학생에게 선언서를 낭독하도록 기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수영(1883~ 1950) 선생은 1919년 영명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이 학교 졸업생인 김병수로부터 선언서와 함께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수영은 이두열· 박연세 등과 협의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거사일을 군산 장날인 3월 6일로 정했다. 그러나 만세 시위 전날인 3월 5일 만세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와 독립 선언문 이 천 여매를 제작하고 각 교회 등에 배포하며 거사를 준비하던 중 박연세· 이두열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김수영은 1919년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ㆍ김인전 선생(1876~1923)

김인전 선생은 영명학교 출신은 아니었지만 군산선교와 관련된 윌리엄 불 선교사가 세운 서천의 한영학교 출신이다.

그는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해방 후 전북지사를 지냈던 김가전 선생의 친형이기도 하다.

영명학교 교사를 재직했던 김인전은 전주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상해로 망명한다.

그는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됐고,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같은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했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ㆍ박헌조(1888~1950)

박헌조 옛 영명학교 교장은 이순길 독립지사의 남편이다. 그의 고향은 오늘날 김제시 공덕면이다.

이곳의 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 명치대 법학과를 중퇴한 뒤 귀국해 얼마 후 군산영명학교 교장(1913년)으로 취임, 학교 발전에 힘을 쏟았다.

일본 유학시절 가인 김병로 선생(해방 후 초대 대법원장)과 같은 대학에서 유학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단다.

영명학교에서 나온 뒤 사회활동과 야학을 통해 사회계몽운동에 앞장섰고 해방후 군산시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하기도 했다.

ㆍ오긍선(1878~1963)

오긍선은 의사로서 피부의학 분야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의료봉사 사업을 벌이고 보육원과 양로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약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했다.

1902년 미국으로 유학, 루이빌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자격증을 받았고, 6개월간 피부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직했고, 의료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에서 피부비뇨기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해 과장 겸 주임교수가 되었다. 1942년 일제의 압력으로 세브란스 의전 교장직을 사임한 뒤에는 보육사업에 전념했다. 해방 후 많은 공직과 의료분야 등을 오갔다.

하지만 친일 행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인물이다.

# 선교사 출신 영명학교 교장들

1890년대 이후 대한제국의 말기엔 외세침략과 국권침탈 등으로 민족사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와 근대 병원 및 학교 건립을 통해 도탄에 빠진 당시 민중에게 큰 힘이 됐다.

군산선교스테이션을 구축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군산개항 이전부터 하나둘씩 군산으로 들어왔다가 동학혁명 이후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벌였다.

그중 대표가 전킨 선교사 부부와 윌리엄 불 선교사 등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아래의 내용은 주간 기독교신문과 서종표 목사의 저서, 인터넷 자료 등을 참조했다.

ㆍ‘군산 선교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1865~1908)

한국 선교 초창기 16년간 호남 선교의 초석을 다진 전킨 선교사.

그는 1865년 12월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나 워싱턴 앤 리 대학교(Washington & Lee University)와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한 뒤 1892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1891년 안식년차 미국에 들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회에서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듣고 자원, 조선을 찾았다.

그는 1895년 호남 최초로 군산 일대에서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다. 그가 세운 교회는 구암교회, 개복교회, 지경교회, 남전교회, 송지동교회 등이다. 또 멜볼딘여학교, 영명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 궁멀 야소병원(예수병원) 등을 설립했다.

전킨 선교사(1865~1908: 한국명 전위렴)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7인의 선교사 중 한명이다.

그는 1892년 제물포(인천)를 통해 서울로 왔고 순회선교 활동을 마친 후에 호남 쪽을 맡아 복음의 씨를 뿌리기로 했다.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료선교사(1859~1926: 한국명 유대모)는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군산포 선창가(근대역사박물관과 옛 군산세관 사이)에 1895년 3월 첫발을 내디뎠다.

두 선교사가 자리 잡은 곳은 조선시대 옥구군 북면에 위치한 군산진 자리인 수덕산.

전킨· 드루 선교사는 어느 정도 선교 활동이 익숙해지자 1896년 4월 5일 가족들과 함께 군산에 정착했다.

후에 전킨 선교사는 전주로 이주, 전주서문교회를 재건축하기 시작하여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건축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정한 20리 밖을 나가서 여섯 교회를 개척하고 고아원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1908년 1월 2일 풍토병 등으로 건강이 악화돼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ㆍ윌리엄 불 선교사(1876~1941: 한국명 부위렴)

그는 1876년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태어나 햄튼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리치먼드 버지니아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899년 7월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12월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첫 사역지인 군산에서 사역했다. 당시 군산에는 전킨과 드루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3명의 선교사 (불, 해리슨, 엘비)의 합류로 군산지역 선교활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전킨 선교사를 도와 사역하던 중 엘리자베스 엘비 선교사 (1869~1957)와 결혼하여 선교의 동반자가 됐다. 부인 엘비는 불 선교사와 함께 멜볼딘여학교의 발전에 매진했다.

​그는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에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서 전국 최초의 12인조 밴드를 만들어 전도 활동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군산 이외에도 부안, 김제, 옥구 및 충남지역까지 복음을 전파했단다.

1915년에는 전라노회 노회장, 1919년 전북노회 회계로 봉사했을 뿐 아니라 전북지방 전도부를 만들고 지역 교회 부흥의 불을 지폈다.

​또한 그는 학교 교육 사역에도 적극적이었다. 평양 신학교에서 5년간(1910~ 1915) 강의를 담당한데 이어 영명학교 등의 운영에도 힘을 썼다. 그 외에도 자신의 어학 교사였던 오긍선을 미국에 유학시켜 의학을 공부하게 하여 한국 의료계 발전에 기여한 공도 있다.

그가 군산선교와 지역교육발전에 쏟은 기간만도 41년이나 됐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한 뒤 그해 12월에 생을 마감했다.

ㆍ월리엄 린튼(1891~ 1960)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빌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한국명 인돈)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프레스톤(J. F Preston·한국명 변요한)의 강연에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스(Genral Electrics) 입사를 포기하고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21세 나이에 미국남장로교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들어온 인돈은 이후 48년 동안 교육과 의료사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2년 당시 21살의 젊은 선교사는 목포항을 통해 첫 선교지인 군산에 도착한다.

영명학교 교사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고, 1917년에는 교장이 된다. 인돈은 군산지역의 3·1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1919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서는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 우리 민족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과 일본의 극악한 만행을 알리는 데 힘썼다.

군산 영명학교 교장 직을 수행하던 시절에는 한국어로 성서와 영어도 가르치며, 동료 교사 및 학생들과 깊은 친분을 형성했다.

실제 3·5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이를 몰래 숨겨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돈 선교사를 만세운동 배후 지도자로 지목받기도 했다.

1922년 인돈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딸인 샤로테(Charlotte Witherspoon Bell: 한국명 인사례)와 결혼한 이후 전주로 이동하여 교육선교를 이어간다. 인사례는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인돈 또한 자신의 아들들에게 지게 지는 방법을 가르칠 정도로 부부가 나란히 한국을 사랑했다.

인돈은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자학교의 교장으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 열매도 보았다. 그러나 일제는 선교사들의 학교운영을 통제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특히 신사참배 강요는 1937년 이후 극에 달했다.

훗날 전주 신흥학교 교장시절에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폐교를 맞고, 본인은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해방 후 신흥학교로 돌아온 그가 전주신사가 있던 자리에 화장실을 세웠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도 인돈은 떠나지 않고 한국을 섬긴다. 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인돈은 대전으로 사역지를 옮겨 선교사역을 이어간다. 대전에 기독교 인재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총장으로 헌신하다가, 1960년 건강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Hugh Linton ·한국명 인휴)도 선교사로서 이 땅의 결핵환자들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인휴의 아들 스티브(Steve Linton· 한국명 인세반)와 존(John Linton· 한국명 인요한)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세브란스국제진료소장 등으로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다.

한편 영명학교 출신들 중 특징적인 인사들이 과거 자료에서 빠진 내용이 있어 보강하고자 한다. 다음 내용은 익산열린신문 2014년 3월21일자 내용을 참조했다.

# 한국기독교사적 19호 지정 ‘웅포 제석교회’

1906년 대붕암교회 설립 초기 고패집(ㄱ자) 문화유산 가치

익산‧ 군산‧ 강경 3.1운동 발상 거점지…한국민족사에 ‘큰 획’

제석교회는 1906년 설립됐다. 정확히 말하면 1906년 12월 25일 엄주환 씨 사랑채에서 역사적 교회창립예배를 드렸다.

웅포면 대붕암리에 살던 엄주환‧강진회‧홍종익‧송원규‧강두희‧강문회 등이 군산선교부 윌리엄 해리슨(1866~ 1928: 한국명 하위렴)선교사에게 교회 설립 허락을 받은 것.

교회로서 형태를 갖춘 제석교회는 1908년 하위렴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파송됐다. 하위렴 당회장은 1929년까지 20여 년간 제석교회와 함께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열악한 지역민을 깨우치고자 1909년 4월 30일 사립 부용학교를 지금의 교회자리에 설립했다. 약 100여명의 학생을 둔 사립부용학교는 제석교회 성도들이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강제폐교를 당했다.

지금까지 군산‧ 익산‧ 강경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익산‧강경은 3월 10일경, 군산은 3월 5일 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지역 3.1운동 주역들이 사립 부용학교 졸업생과 군산영명학교에 진학했던 제석교회 성도들이다.

특히 강경 3.1운동을 주도했던 엄창섭(제석교회 설립자 중 한사람인 엄주환의 3남)‧ 엄칠중(현 엄은섭 집사 작은 할아버지), 군산학생대표인 강인성(강두희 제석교회 초대장로의 큰 아들)의 재판기록을 보면 제석교회가 군산, 강경, 익산 지역 3.1운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산에서 강경연락책으로 갔던 강금옥(강성주), 한길용(당시 영명학교 학생‧ 제석교회 한기석 원로장로 부친), 강관성 등 3명도 이 교회의 교인들이다.

이처럼 제석교회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주도하게 된 것은 만주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을 적극 돕던 엄칠중이 고향 대붕암리로 내려와 교회를 중심으로 사립 부용학교(지금의 웅북초등학교의 전신)와 군산영명학교 후배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엄칠중은 강금옥을 3.1운동 거사 연락책을 맡게 해 한길용과 함께 강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엄창섭을 도와 강경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

3.1운동을 주도한 제석교회 교인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형우.

재판기록과 익산시독립운동사를 보면 이형우는 1919년 3월 2일 천도교 함열교구장 최재봉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용안읍내에 뿌렸다.

이어 3월 10일 함라면과 웅포면 책임자였던 민영순과 함께 웅포, 함라, 함열, 용안 등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형우는 그해 8개월간 영어의 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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