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30일 오전 10시30분 폭발사고 소방대원 9명 사망 등 사상자 1천여명 추정
동부시장 인근 옛 농토에 1927년 1200m 규격 정식 경기장 건립
군산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경포천에서 건너려면 경암동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진입하는 경마교가 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상황에도 군산에는 현재 경마장은커녕 장외발매소(화상경마장)도 없는데 경마장이라니.
경마교(競馬橋)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경마교 건너편 경암동 일대에는 1927년에 개장한 국내 최초의 경마장이 있었다. 그것도 공식 규격이었다. (군산역사이야기 중 내용 요약)
전국 최초 군산경마장 탄생 역사
군산에서 언제부터 경마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래도 추론 가능한 시기는 1920년대 초반.
개항 후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오고 일제강점기 들어 일본인 농장주들의 침탈로 경제 주도권이 상실됐다. 반면 이들은 산업자본가로 변모하고 경마와 같은 오락문화를 확산시켰다.
군산에서 처음 경마를 시작한 곳은 해안 매립공사로 넓은 간척지가 조성된 옛 선경목재부지 인근 중동 강변과 소룡동 간척지였다.
경마 경주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23년 경부터였는데 경제침탈을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 농업 등 산업자본가들은 미두장과 같은 도박영업을 목적으로 본격화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경마구락부 회원이던 농장주 미와사끼가 1927년 경장리 일대, 지금의 경암동 동부시장 인근 농토 약 7만㎡(2만1000평)를 경마장으로 매입 1200m의 경마장을 건립했다. 이 경기장이 전국 최초의 공식규격 경마장이었고 이를 기념해서 추계대회를 5일간 열었단다.
이후 경마장에 열기가 더해지자 1928년 5월22일 군산의 경마구락부가 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아 공식단체가 됐고 1932년 경기장 규모를 확대, 주로(走路)를 1600m로 확장했다.
조선의 경마는 태평전쟁의 발발과 함께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사실상 중단되는 상황을 맞는다. 태평양 전쟁 말 미군착륙을 저지하기 위해 주로(走路)를 사실상 없애는 바람에 경마장의 기능을 수명을 다했단다.
김중규의 군산이야기에 따르면 경암동 동부시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군산 경마장의 모습을 보면 일자의 대형마구간이 길게 자리하고 있었고 경마장 중앙의 타원형 부지는 보리밭으로 사용했단다. 말들이 달리는 트랙만 맨흙바닥으로 다져 있었고 트랙 외곽에는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을 뿐 아니라 나무로 만든 적은 규모의 관람석이 있었다. 당시 경마 구락부 사무실은 대명동 소재 항도약국 자리에 위치해 있었단다.
군산경마장 폭발사고… 42명 사망 1000여명 부상 추정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문을 닫은 군산경마장은 불과 4여년 만인 1945년 11월 폭발사고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증언자와 ‘군산역사 이야기’ 등에 따르면 일제 패망 뒤 군산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폭탄을 경마장에 보관했는데 관리 소홀로 엄청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때 인명피해는 사망자 수만 한국인 19명, 미군 23명 등 모두 42명에 달했고 주변의 물적 피해는 엄청났다. 이후 경마장 터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임시 거처로 쓰이다 현재 주택가로 변했고, 경마장은 기억에만 존재하게 됐다. 이를 기억하는 것은 경마교와 폭발사고 당시 순직한 의용소방대원을 기리는 월명공원 추모행사(위령제) 뿐 이다. 이것이 의용불멸탑이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내용은 고(故) 최영 작가의 풍물이야기에도 전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45년11월30일(화)오전10시30분, 중앙 초등학교 4학년인 권오석과 이종남 등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지가 진동하며 학교가 땅에 꺼지는 느낌을 받자 학생들과 선생님이 서로 껴않고 엎드렸습니다. 2층에서 수업중인 어떤 선생님은 놀란 나머지 아래로 뛰어 내려 크게 다쳤습니다. 유리창, 칠판, 게첩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많은 학생이 다쳤습니다.
이날 김윤만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던 4학년생 김신웅은 학교가 크게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천장 조각에 얼굴이 찢어져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종남, 김신웅 모두 열한 살(1935년생)이었습니다. 8.15일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묻거나 창고에 쌓아 두고 간 폭탄 창고가 있는 군산 경마장을 미군이 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날씨가 추워서 미군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우다 전도된 열로 포탄이 연쇄적으로 터진 것입니다. 군산경마장 폭발의 진동과 폭파 음이 군산 시내는 물론 멀리 익산 이리 김제 청하까지 들렸다합니다. 전라북도일지와 군산시사에 의하면 군산경마장 폭발 사건으로 의용소방대원 9명, 미군헌병 23명, 경찰(소방) 7명, 일반 시민 3명 등 42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부상, 건물전파 177동, 이재민 65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군 중상자는 비행기로 서울로 이송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영작가의 풍물이야기 중
이를 추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 월명동 흥천사 위 월명공원 비둘기집 인근에 있는데 ‘군산의용대의 의용불멸비’다. 약 16년이 지난 뒤에서야 그들의 업적과 영웅적인 활동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1961년 5월5일 강정준(당시 백화양조 회장이자 호원대 설립자) 의용소방대장과 지종환 군산소방서장이 건립한 군산경마장에서 산화한 대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이 돌비석에 대장 권영복, 부대장 김덕제, 반장 박기봉, 서정운, 이을문, 대원 김남선, 김복득, 곽한수, 이규철 등 모두 9명의 영웅들 이름이 아로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