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연립 4부: 민정이 엄마의 세계 #3] 서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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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동 연립 4부: 민정이 엄마의 세계 #3] 서로의 시간
  • 김규아
  • 승인 2026.10.09 06:15
  • 기사수정 2026-10-09 0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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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유난히 시끄럽게도 울어댔다. 햇빛을 잔뜩 먹은 마당은 눈이 부셨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흰 홑이불이 바람이 불 때마다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나란히 걸린 메리야스와 교복 남방도 느릿느릿 흔들렸다. 흰 빨래 너머로 파란 하늘이 출렁였다.

녹슨 수도꼭지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아이고, 물도 뜨겁네.”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던 막내 여동생이 손을 털었다. 데일까 봐 벗어놓은 양말로 수도꼭지를 감싸 쥐고 잠갔다. 양말이며 속옷을 막 널려고 할 참이었다. 흰 홑이불 사이로 빨간색이 얼핏 비쳤다. 여동생이 손차양을 하고 대문 밖을 내다봤다.  

빨간 블라우스에 흰 미니스커트를 입은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번뜩이는 선글라스 너머로 마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옴마야!” 여동생이 기겁하며 들고 있던 빨랫감을 놓쳤다. 젖은 양말과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흙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이 보였다. 커다란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언니?”

여자가 웃었다. “야, 뭘 그렇게 봐?” “언니! 맞지?” 막내 여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니…….” 말끝이 울음에 잠겼다. “울긴 왜 울어. 더워 죽겠구만.” 정자가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양손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엄마는?” “시장에 도나스값 받으러 나갔어.” “셋째는?” “군대 갔어.” “벌써?” “에유….” 정자는 피식 웃었다.

마당 한쪽에 낡은 구루마가 세워져 있었다. 손잡이는 전보다 더 거뭇해졌고, 나무판 여기저기에 때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정자는 잠시 구루마를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봐.” 보따리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매듭을 풀자 파란 잠바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 아래로 꽃무늬 블라우스와 남색 바지, 줄무늬 남방, 양말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빛바랜 방바닥이 금세 울긋불긋해졌다.

“이거 다 뭐야?” “옷이지.” “팔라고?” 정자가 웃으며 파란 잠바를 여동생에게 던졌다. “니 꺼야.” “내 꺼?” “입어봐.” 여동생이 얼른 팔을 끼웠다. “근데 너무 화려한데?” “촌스럽기는.” “히히.” 거울 앞으로 달려간 여동생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정자도 따라 웃었다. “남자애들 옷 잔뜩 사 왔네.” “막내가 있잖아.” “웅.” 문살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빛이 조금씩 짧아졌다. 방 안이 어둑해졌지만 바닥에 펼쳐진 새 옷들은 유난히 선명했다.

끼이이익. 대문이 열렸다. 정자의 손이 멈췄다. 막내 여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엄마 왔나 보다.” 방문을 열자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낯선 하이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운데도 회색빛 전대를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정자냐?” “응.” “밥 먹었냐?” 한참 어머니를 바라보던 정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응.” “진짜 먹었어?” “몰라.” 어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전대를 주섬주섬 뒤졌다. “출출하니 이거라도 먹어라.” 냅킨에 싸인 모찌였다.

정자의 입가가 잠시 굳었다. “엄마, 이것 봐.” 모찌를 밀어내고는 보따리를 가리켰다. 막내 여동생이 파란 잠바를 입은 채 뛰어나왔다. “언니가 사 왔어.” 어머니가 소매를 한번 만져봤다. “좋다.” “내 꺼래.” “옷이 짱짱해서 오래 입겄네.” 어머니는 덤덤하게 말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게 다였다.

등유 냄새가 훅 끼쳤다. 찌이이익. 어머니가 곤로의 다이얼을 돌리자 심지가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성냥을 그었다. 치익. 푸른 불꽃이 잠깐 솟았다가 곤로의 심지로 옮겨붙었다. 어머니는 손에 든 성냥갑에 새겨진 글씨를 내려다봤다. 우정다방.

곤로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서 밥물이 끓어 넘쳤다. 구수한 밥 냄새가 부엌을 채우고 안방까지 흘러들었다.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길게 늘어진 검은 전선을 더듬었다. 딸각. 더듬이처럼 생긴 와이어 두 개가 솟은 동그란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누르스름한 빛이 부엌을 밝혔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밥!” “다 됐다.” 부엌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내가 신발을 벗다 방 안을 보고 멈췄다. 정자가 웃고 있었다. “몰라보겠냐?” “누나?” 막내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많이 컸네?” 정자는 일어나 막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던 녀석이 어느새 정자보다 커져 있었다.

“이리 와봐.” “왜?” 정자가 막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어디 좀 보자.” “아, 놔.” 막내가 얼굴을 빼자 정자가 웃었다. “다 컸다, 이거여?” “나 고등학생이야.” “그래 봐야 우리 막내지.” 정자는 방바닥에 펼쳐둔 옷 가운데 남방 하나를 집었다. “입어봐.” “내 거야?” “싫어?” 막내가 얼른 받아들었다.

“여기서 입어.” “아냐.” “왜? 컸다고 내외하냐?” “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간 막내가 잠시 뒤 새 남방을 입고 나왔다. 얇은 천 아래로 속살이 어슴푸레 비쳤다. 정자는 흐뭇하게 막내를 바라봤다. “어디 보자.” 품을 맞춰보려는데 막내의 어깨에 시선이 멈췄다. 회색빛 무언가가 얼핏 비쳤다. 연꽃 같았다. 정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막내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옷자락에 가려졌다.

“팔 좀 줘봐.” 정자가 막내를 돌려세우려 손목을 잡았다. 손등에 닿은 손끝이 멈췄다. 굳은살이 만져졌다. 손가락 마디에는 검붉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손이 왜 그래?” 막내가 손을 빼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싸웠어?” “복싱하다 그런 거야.” “복싱?” 막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옷 갈아입을래.” 작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정자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지직. 안방 천장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정자는 눈을 비볐다. 아까 막내의 어깨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형광등이 다시 한번 깜빡였다. 정자는 천장을 노려봤다. ‘내일 저놈의 형광등부터 갈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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