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포초(35년 4월개교) …서왕초(97년 3월) +나장초(2002년 3월) 통합
1971년 3월 개교한 나포중 … 제52회 총 3,547명의 졸업생 배출
나포면과 관련된 사료들은 많지만 독립된 면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는 고종 32년인 1895년이었다.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과거 백제 땐 히산현 소속이었고 고려 때 이후 임피현에 편입되었다가 1895년 조선 말 고종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피군 북삼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일제강점기 군면의 폐합으로 옥구군 나포면으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임피읍내 북쪽이라 해서 ‘북삼면’이라 했다.
이곳의 관할지역은 외곤, 강정, 등동, 나기, 서지, 와촌, 군둔, 세류, 장동, 용산, 신곡, 수철, 세곡, 나포, 옥동의 15개 동리였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하북면의 서포, 신성, 외곡, 진장, 입점, 부곡의 9개 동리와 상북면의 신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포의 이름을 따서 나포면이라 하여 옥구군에 편입됐다.
오늘날은 서포, 주곡, 부곡, 옥곤, 장상, 나포의 6개 리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쪽은 익산시 웅포면과 함라면, 남쪽은 서수면과 임피면, 서쪽은 성산면, 북쪽은 금강 건너 서천군 화양면 한산면에 닿아 있다.
한편 나포면사무소 현청사는 2007년 11월23일 개청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나포면의 교육기관… 나포초등학교와 나포중학교
나포초등학교는 1935년 4월 15일 나포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61년 7월 22일 서왕분교를 설치하고, 1963년 4월 30일 나장분교를 설치하였다. 1996년 3월 1일 나포국민학교에서 나포초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나포초는 농촌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1997년 3월 1일 서왕초등학교를, 2002년 3월 1일 나장초등학교를 각각 통폐합했다.
나포초는 2025년 2월 제84회 졸업식으로 총 5,47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유치원 1학급과 초등학교 7학급으로 편성되어 있다.
나포중학교는 1971년 1월 16일 설립 인가를 받고, 같은 해 3월 8일 개교했다.
나포중은 2025년 2월 제52회 졸업으로 총 3,54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나포문화마을
한국농어촌공사는 과거 30여 전부터 농촌의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 중인 문화마을조성사업을 활발히 추진해왔다.
문화마을의 탄생은 농촌공사가 농촌마을을 집단화시키고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전국에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농어촌공사는 도내 최초로 1993년 시범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한 고창군 고수문화마을에 단독주택 52필지. 근린시설 4필지를 1994년 9월에 분양을 완료한 후 주택을 건설했다.
나포문화마을도 2만5,000여평의 부지에 단독주택 105필지. 근린시설 14필지 등의 분양을 1994년 말에 마치고 주택 건설에 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나포 뜰아름마을
뜰아름마을이 있는 나포면 주곡(酒谷)리 원주곡마을의 이름은 금강 주변 평야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로 술을 자주 빚었다고 하여 술의 마을이란 의미의 ‘술골(酒谷)’에서 유래했단다.
농촌진흥청은 2002년 농촌 고유의 전통문화 자원을 발굴·개발하여 도시민의 농촌 생활 체험·학습의 장을 마련하고 전통문화의 맥을 활성화하기 위해 농촌전통테마마을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2002년 9개 마을로 시작, 2013년 현재 전국에 66개 마을을 지원 운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산물인 뜰아름마을도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2년 동안 국비와 지방비 등 2억 원을 지원받아 샘골을 복원했다. 이 마을 앞 정원 가꾸기 등 동네 고유 지질학적 자원 발굴을 비롯해 농심체험장시설, 주변경관을 이용한 농촌관광상품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전통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나포면의 재미난 동네 ‘숫골’ 유래
주곡리는 본래 임피군 화북면의 지역으로서 숯골 또는 주곡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곡리, 대동리, 자양리, 하주리, 상주리, 서포리의 각 일부와 북삼면의 등동리 일부를 병합해서 만들어졌다. 이 때 옥구군 나포면(현재 군산시 나포면)에 편입됐다.
주곡리는 돗자리, 삼베, 갓 등으로 유명했다. 주곡리는 원이름이 ‘숫골’이다. 숯을 구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여 이른 이름인 듯하나 사실은 돗자리 등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숯골’을 술골로 알고 주곡(酒谷)이라 한 것 같다. 이것도 원래는 배 ‘주(舟)’자를 쓰다가 술 주(酒)자로 변했다 한다.
한때 주곡리의 마을 모두를 ‘개건너’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 건너’란 말 그대로 개천 건너란 뜻인데 이것으로 보아 지금 들이 된 마을들의 사이에 큰 개(개울)가 흘러 이른 것 같다. 이 ‘개’는 담수(淡水)의 개천이 아니라 금강의 강줄기가 뻗어 있었던 것.
‘숫골’은 약 2백여년 전부터 돗자리로 이름났다.
우리나라의 돗자리 중 강화도엔 화문석, 숫골에서는 요석이라 손꼽을 만큼 유명했다. 요석은 왕골로 짠 것으로 그 제품은 고급스러워 거의 서울 궁궐 또는 벼슬아치들에게 비싸게 팔려나갔다. 옛날부터 이름을 떨친 토산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