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55] ‘금강’의 동네 나포십자뜰… ‘옥구(沃溝)’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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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55] ‘금강’의 동네 나포십자뜰… ‘옥구(沃溝)’ 어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5.11.12 13:05
  • 기사수정 2025-11-28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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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들판과 이어진 도랑이 장관 이룬다는 ‘옥야구혁(沃野溝洫)’
나포 십자뜰… 원나포~ 서포까지 갈대가 무성했던 금강변 간척지
고조선 등과 관련된 전설 담은 ‘신화의 땅’ 공주산
가을철 나포 십자뜰 전경. / 사진=투군
가을철 나포 십자뜰 전경. / 사진=투군

군산은 옛날부터 기름진 들이 한없이 이어지는 이랑의 장관에서 ‘옥야구혁(沃野溝洫)’이라 불린 곡창지역이었다.

이 사자성어에서 ‘옥구(沃溝)’란 말이 나왔다. 이렇게 과거 군산시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옥구군이 탄생한 것이었다.

남쪽으로는 완주군 소양면 위봉폭포에서 발원한 만경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에서 발원하여 400㎞를 굽이굽이 흘러 돌아 ‘비단강’이라는 별호를 가진 금강(錦江)이 둘러쳐져 복주머니 형상을 하고 있다.

만경강과 금강의 하구 사이에 비옥한 들녘이 널리 발달, 식량생산의 주요지역이었으며 야트막한 산들이 널려 있다. 이런 산들의 모양새를 두고 오늘날의 군산(群山)이란 지명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산기슭에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이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육상과 해상 교통이 발달한 천혜의 복 받은 땅이다.

금강의 하류의 특성을 살려 간척이 이뤄졌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나포의 너른 들녘이 ‘나포십자뜰’이다.

가을 수확철을 지나면 먹이를 찾아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모여드는 군무(群舞)가 장관을 이룬다.

여기에 현대식 농촌마을이 만들어졌는데 1993년 농어촌공사의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나포문화마을이다. (아래 내용들은 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을 다수 참조했다.)

# 암흑의 시대에 탄생한 ‘나포십자뜰’… 1920년대 간척사업

/ 사진= 독자제공
/ 사진= 독자제공

아이러니하게도 너른 평야가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군산지역의 가장 높은 산들이 금강변과 밀접하게 연접해있다. 그래 봐야 다른 곳에서 보면 야산에 불과하지만…

군산 최고 높은 산은 망해산(230m)이고, 두 번째의 산은 오성산(227.5m)이다.

나포와 연접한 성산면의 오성산에 정상에서 동북동쪽을 바라보면 북에서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북동으로 공주산을 시작으로 망해산, 축성산, 오성산 등의 산에 둘러싸여 있는 너른 들들이 보이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나포십자뜰.

나포십자뜰은 원나포에서 서포까지 갈대가 무성했던 금강 변을 1920년대 간척사업을 통하여 총 530만㎡의 농경지로 바뀐 것.

1920년대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우리나라를 식량생산의 전진기지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식량수탈에 앞장섰던 일본인 지주들이 군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더 많은 농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갖은 악랄한 수법을 써왔을 뿐 아니라 간척사업에도 혈안이 되었던 시대였다. 당시 민초들은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간척사업에 내몰리어 노동력의 착취를 당하였다.

그 이전에는 자연의 지형을 이용한 구불구불한 농지를 경작하던 조선인들의 눈에는 완공된 나포십자뜰이 반듯반듯 ‘열십(十)자로’ 농로가 나고 농지정리가 잘된 뜰로 변모했다. 이를 보고 당시 주민들은 ‘나포에 가면 십자로 길이 난 너른 들이 있다’며 신기해했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이 나포십자뜰.

이때 만들어진 제방이 오늘날에는 긴요하게 레포츠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자전거동호인들과 라이더들이 이곳을 무대로 공주보 등으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자리잡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금강변의 나포 제방.
금강변의 나포 제방.

# 고조선과 관련된 원나포마을의 공주산 전설

신화의 땅 공주산. / 사진= 독자제공
신화의 땅 공주산. / 사진= 독자제공

나리포 옆에 공주산(64m)이 있는데 옛 고조선 마지막 준왕은 위만의 배반으로 나라가 망하자 신하들과 바닷길로 남하하다가 이곳에 도착했단다.

그런데 공주가 병이 나자 딸을 남겨놓고 산을 넘어 익산으로 넘어가 마한을 세우고 나서 후에 딸을 데리고 갔는데 후세사람들이 공주가 있었던 산이라고 해서 공주산이라고 불렀다고.

이곳의 존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성종 때 간행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26년 증보, 간행한 책) 임피현 산천조에도 간략히 남아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공주의 태(胎)가 묻혀 있어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충남 공주에 있는 산이 홍수로 인해 떠내려올 때 빨래하던 아주머니가 빨래 방망이로 건져서 이곳에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공주에서는 자기네 산이라고 주장하며 매년 세금을 걷어가자 이곳 사또가 억울하게 생각하던 차에 심부름하던 소년이 사또에게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사또가 공주의 아전들을 불러 산이 떠내려와 이곳에 논과 밭이 피해를 가져왔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 후부터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얘기 때문인지 몰라도 원나포 마을주민들은 공주산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마을주민 공동명의로 등기를 한 후 관리하고 있다고.

한편 공주산에 있는 성황당은 가보지 못했지만 옛 전설을 대변하듯 남아 있단다.

군산에서 서북쪽으로 약 18.1㎞ 떨어진 나포면의 구 소재지인 원나포 뒷산인 공주산 중턱에는 70여 호의 주민들이 대를 이어 섬겨 오던 당집이 있다. 당집은 초가 단칸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에 올라서 당집 문을 열면 북쪽 벽의 중간에 선반을 지르고, 좌우측에는 곡식 한 말들이 독에다가 묵은 쌀을 가득 담아서 백지로 봉한 뒤에 뚜껑을 반드래기로 덮고서 이를 할머니와 할아버지 당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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