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및 태조 어진 제작 비롯한 호남권 활동한 의병장 등 다작
보물‧ 각종 문화재급 작품 남겨… 면암 최익현‧ 최치원 선생 등
‘고종 어진을 비롯한 최치원 선생 초상, 면암 최익현(1833~1906) 초상, 의병장 임병찬(1851~ 1916) 및 춘우정 김영상(1836~ 1911) 선생 초상, 우국지사 송병선(1836~ 1905) 선생 초상…’
또한, 보물로 지정된 ‘최익현 초상(1510호)’과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청양 최익현 압송도’를 비롯해 무성서원의 대표 제향 인물인 ‘최치원 초상’, 병오창의(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정읍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기병한 호남 최초의 의병) 관련 인물 ‘김기술 초상’ 등등…
이와 같은 엄청난 작품들을 남긴 이가 ‘어진 화가’ 석지 채용신(蔡龍臣 1850~ 1941).
호는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이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초상화가.
최근 그가 정읍시립박물관에서 기획 전시(4월29~ 8월3일)한 ‘초상, 시대를 담다(부제: 석지 채용신과 정읍의 인물들)’와 지난달 26일 개최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의 ‘근대를 열다: 군산의 화가와 예술’ 등에서 잇따라 소개됐다.
그의 기획전과 학술세미나 등에서 그만의 필법으로 남긴 구한말 정읍과 군산 등 대표적인 우국지사와 의병장 등은 물론 고종 어진과 흥선대원군(이하응) 등의 작품들이 바로 그것.
그의 일대기를 보면 어린 시절과 관직 생활을 제외하면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전북권에서 대부분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물론 군산과 인연도 이때 이뤄졌다. 1901년이다.
우국지사 연재 송병선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우선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전북과 충청권 등지에서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충남 회덕을 떠나 후학 양성을 위해 전북으로 본격 이주한 뒤 개정면 아산리에 낙영당을 건립했을 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부모의 묘를 임피면 술산으로 이장했다.
연재는 이곳에서 살면서 66세(1901년)에 낙영당의 강회를 통해 벼슬살이를 겸하고 있는 어진화가 채용신과 만났고 그의 초상화도 이때 그렸단다. 낙영당 강회에 초청된 면암 최익현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이곳과 연을 맺은 석지는 임피현령 송순혁 초상을 이 시기에 그렸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석지는 군산출신 의병장 임병찬 선생의 초상(1911년)도 그렸고 1901년 낙영당 강회에서 만난 최익현 선생의 초상 등의 각종 작품은 물론 수많은 호남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걸작으로 남겼다. 심지어 그들의 충절과 관련된 작품들도 다수 남겼다.
석지는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시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채석지 필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조선후기 최고 초상화가였다.
특히 고종 어진을 그리며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은 석지는 20세기 초 실질적인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전북으로 낙향해 초상화를 비롯해 화조영모화, 산수화, 고사인물화 등의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초기 초상화는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근육과 살결을 나타내는 육리문(肉理紋) 묘사에 주력하면서 많은 선을 사용하여 요철‧ 원근‧ 명암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
그는 본래 본업이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직과 군수직 등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제작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전주에서 살았으나 조부 채홍순 때 서울 삼청동으로 이사했고 유년기부터 그림 공부에 몰두했다. 특별한 스승도 없었지만 천부적 소질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림 솜씨 못지않게 활쏘기에 능했다. 1886년(고종 23) 실시한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때 용신으로 개명했다.
고종의 어진을 그려 군수를 역임했으나 1906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56세 때 전주로 낙향했다. 그는 선대의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익산, 김제 등지에 거주하면서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1909년엔 금마면으로 거처를 옮기고 금마산방(金馬山房)을 운영했다. 1923년부터는 아예 직업작가로 나서면서 정읍시 신태인읍 육리에 ‘채석강도화소’라는 공방을 차렸다.
주문제작 방식의 초상화 전문공방을 운영한 그는 1941년 정읍에서 생을 마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