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명의 농민항쟁 유공자 관련 자료· 공적 모은 역사기념관 만들어야
서수항쟁기록 찾기에 헌신한 후손들의 노력… 고 문병준 시의원 등
2년 후 100주년 앞두고 해묵은 과제 수두룩
옥구농민항쟁이 왜 서수를 중심으로 일어났을까.
앞선 구암동의 영명학교 및 구암교회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군산 3.5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그 주역들은 선교사와 기독교가 그 핵심 연결고리였다는 게 역사적인 사실이다.
옥구농민항쟁 역시 궤를 같이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구한말 이곳의 정신적인 지주인 이용휴 선생의 지조와 정신적인 유산을 이어받아 그의 서당에서 교육을 받고 옥구농민항쟁의 주역으로 거듭났거나 그런 지역의 분위기가 농민야학운동 등으로 승화됐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는 이용휴 선생의 지조를 듣고 배운 이곳 출신들이 당시 일제강점기의 농업모순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으로 일제와 일인 농장주와 맞섰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선비 정신과 당시 지식인들은 시대적인 고뇌와 농토를 침탈당한 농민사회의 대변자로서 나서면서 농민소작투쟁의 서막은 열렸다.
옥구농민항쟁의 전 과정을 살펴보자면 서수농민야학도 1920년대 흐름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 ‘브나로드’(계몽운동) 운동의 한 줄기였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옥구농민항쟁의 중심공간에 등장하는 장소들로는 이용휴 가옥과 서당채, 임피역전 경찰관 출장소, 이엽사농장사무소, 침탈상징공간(헌곡답, 서수신사 등) 등이 농민항쟁의 기억물들이다.
# 농민항쟁의 기억물들
* 사라질 위기에 놓인 이용휴 가옥과 서당채… 농민야학의 공간
옥구농민항쟁의 발단이 된 주요 인물과 장소가 한 인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심인물이 구한말 선비 이용휴 선생이다. 그는 자신의 안채에 서당을 설립하고 인근의 사람들을 교육했고 그의 후손들도 농민야학의 든든한 후원자로 역할을 했다. 이용휴 가옥의 서당채는 마을의 중심지로 마을의 주요회의와 행사가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서당채는 1950년대 말 철거된 후 흔적도 거의 남지 않았다.
본채인 원래 4칸의 초가집이었으나 1970년대에 기와로 지붕개량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수년 전 여름 첫째간이 무너져 시급한 보수와 보존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다.
* 침탈의 상징 이엽사농장사무소 등
이용휴 가옥의 서당채와 대비적인 이엽사농장과 일본 황실 헌곡답터, 서수신사 등 주요 유적지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 공간은 침탈의 핵심공간로서 그 시기의 암울함과 민족정신 말살지란 우리 조상들의 아픔을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 임피역전 경찰관 출장소(주재소)
당시 옥구(서수)농민 500여명은 1927년 11월25일(옥구농민항쟁기간) 일경에 불법체포된 장태성 선생을 임피경찰관 출장소에 가서 구출했다. 항쟁의 불꽃이 일었던 공간이다.
# 서수농민야학은 브나로드 운동 한 갈래 … 상록수와 농우 등 농민소설의 모태
서수에 농민야학이 있었다는 것은 도내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고향출신의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중심이 돼 서수농민야학 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은 그만큼 식민지 모순이 극심했을 뿐 아니라 교육열을 승화한 항일정신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곳 농민야학의 뿌리는 브나로드 운동에서 비롯됐다.
원래 ‘브나로드(vnarod)’는 제정(帝政)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1874년 이 구호를 기치로 전근대적인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브나로드 운동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됐다.
‘브나로드’로 애칭되었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서울의 학생과 지식청년, 문화단체 그리고 동경유학생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시작했다.
이 유학생들이 방학 때 실시한 귀향 계몽운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도 1926년 여름방학 때 귀농운동을 전개했었는데, 이것 역시 학생에 의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배경아래 각급 학교 학생은 학생 서클 조직을 이용, 농촌계몽운동에 나섰다.
특히 수원고등농림학교(오늘날 서울대의 전신) 학생들은 1926년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고, 그 해부터 농민을 계몽하는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9월 경찰에 발각되어 좌절된 적이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다시 교외활동으로 개학 중에는 수원 인근에 야학을 개설, 민족의식을 깨우치며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고 방학 중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선배 졸업생들과 제휴, 농촌개발을 위한 다양한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런 운동의 큰 흐름은 서수지역과도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서수의 농민야학과 연결된 인물 중에는 장태성 선생이 있는데 그는 전주고보 3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후배 박상호 선생의 요청을 받고 이곳으로 와 농민야학을 적극 전개하고 농민조직과 지역청년운동에 중심이 됐다.
장 선생보다 2살 연배인 김영현 선생도 전주고보를 졸업한 뒤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 진학 후 비밀결사사건과 관련됐다가 퇴학, 고향에 내려와 농민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 옥구농민항쟁정신 계승의 숨은 공로자들
해방 후 옥구농민항쟁은 오랜동안 서수라는 공간에 머물렀는데 이를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이들이 있다.
항일지사 문일만 선생(1904~ 55)의 장남 고 문병준 전 군산시의원(1936~ 2022: 2대)이 그 주인공.
옥구농고(현 군산한들고)를 졸업한 문 전 의원은 86년 일부 옥구농민항일투사의 후손들이 노력, 서훈을 받는 것을 보고 부친의 항일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일부 후손들 중에는 대구복심원 등에서 사료 찾기에 나선 결과 서훈을 받았는데 이를 보고 자극을 받은 문 전 의원은 국회도서관과 동아일보사 등을 수없이 방문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옥구농민항쟁과 관련된 다수의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는 당시 언론에 나온 서수면에 사는 유족과 그 후손들을 일일리 방문, 김양규 향토사학자(작고)의 협조를 받아 그 자료를 바탕으로 공적을 찾아냈다. 이를 기준으로 지역 항일투사들의 서훈을 받게 했을 뿐 아니라 옥구농민항일애국지사기념사회를 발족하는 등 오늘의 옥구농민항일투쟁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살리는데 앞장섰다.
오늘날 옥구농민항일투쟁은 그의 노력을 바탕으로 제자리를 찾게 됐고 매년 기념행사(군산문화원)를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옥구농민항일투쟁의 선양사업에 약 4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엄청났다.
그는 작고하기 직전까지 일제의 침략과 압박의 공간들이라 할 수 있는 이엽사 농장터를 비롯한 일본 황실 헌곡답터, 서수신사 등 옥구농민항쟁의 관련된 유적지 정비와 기념관 건립 운동에 사력을 다했다.
한편 옥구농민항쟁의 주역인 장태성 선생을 숨겨주었던 이용덕 가옥과 농민항쟁 유공자 이휴춘· 최은엽 가옥들이 남아 있는 만큼 보존과 활용방안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에 따른 용전마을 주변지역의 전반적인 기초조사와 함께 보존방안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