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였다. 이후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필자는 군산과 서울을 오가며 장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문객을 만나 인터뷰도 했다. 20일에는 서울 여의도에 설치된 분향소에 다녀왔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취재 준비하다가 ‘후광김대중 마을(다음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글(제목: <장례식에 대한 제안입니다>)을 발견했다.
지나칠 수 없어 열어봤더니 미국에 거주하며 회원으로 활동하는 ‘지푸라기(닉네임)’님이었다. 그는 “하관 후 허토할 때 하의도 흙과 봉하마을 흙을 차례로 뿌렸으면 한다, 가능하면 김대중 대통령 유족과 노무현 대통령 유족이 차례로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라고 했다. 대통령님이 지긋지긋한 지역문제(지역감정)를 안고 가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올렸다는 것.
짧은 글이었지만 만은 걸 생각하게 했다. 동서 화합을 의미하므로 고인이 된 대통령님도 기뻐하시겠지 싶었다. 곧바로 관계 비서관에게 연락했더니 고향의 흙은 괜찮은데 봉하마을 흙을 합해서 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곤란하다고 했다. 사물을 보는 눈이 후진국 수준인 정치인들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원망만 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하의도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배가 오후 4시 30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전화하면서도 생가터 흙을 영결식에 맞춰 동교동 자택까지 공수해 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고향이 하의도인 김대의 회원에게 전화해서 전후사정 설명한 뒤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렵게 연결되어 하의면 부면장 박상명 씨와 김종우 우체국장이 옛 생가터 흙을 상자에 담기는 했는데 육지로 공수하는 것이 문제였다. 해서 목포까지만 운반해 주면 알아서 하겠으니 오후 4시 30분 하의도 출발하는 마지막 배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른 방법 없으면 동생에게 부탁해서 목포로 달려갈 요량이었다.
그렇다고 군산 분향소 취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취재에 필요한 도구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통화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배터리가 소진됐던 것. 전화번호 적힌 메모지 놓고 나와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전날 서울에 다녀와 휴식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렵게 취재 마쳐서인지 심신이 몹시 피곤했다. 점심도 저녁도 못 먹고 돌아다녀 배도 고프고 힘도 빠졌지만, 김 전 대통령이 지하에서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에 견뎌낼 수 있었다.
뛰는 가슴 졸이며 하의면 우체국장에게 전화했더니 다행히도 생가터 흙이 목포에 도착했는데 더는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했다. 긴장은 조금 풀렸지만, 이튿날 영결식 이전 동교동 자택에 도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아무래도 목포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동생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고속버스'가 떠올랐다. 해서 김종우 우체국장에게 고속버스 택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하의도 향우민들과 만장을 들고 김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는 김대의 회원과도 통화했다. 마침, 행사 중이었다. 상엿소리가 전화기 통해 구슬프게 들려왔다. 염치 불고하고 행사 끝나면 늦더라도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하의도 흙 담긴 박스 인계받아 동교동으로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새벽 2시 조금 넘어 대통령님 생가터 흙이 동교동 자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회원의 제의로 하의도 생가터 흙을 서울로 가져올 수 있었는데, 흙 상자가 DJ 자택에 도착하기까지 12시간은 가히 피 말리는 순간순간이었다. 그래도 존경하는 대통령님이 지하에서나마 고향 흙냄새 맡으면서 고이 영면에 드는데 보탬 됐다는 것에 보람 느낀다. 서울도 한때 대통령에게는 핍박받으며 살았던 객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애틋했는지 모른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대중 대통령 애도 현수막을 거리 곳곳에 내걸어준 서울, 부산·경남, 대구·경북, 강원도 속초 등지 회원들과 ‘김대의’님, ‘지푸라기’님 등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