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39] 구한말 우국지사 송병선 선생과 장영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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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39] 구한말 우국지사 송병선 선생과 장영규 선생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12.26 12:28
  • 기사수정 2024-12-26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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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 송병선 선생…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거두로 군산서 후진 양성
만석꾼 장영규 선생… 일제강점기 술산초 설립 등 육영사업 앞장선 巨富
연재 송병선 선생의 묘. / 사진= 투군
연재 송병선 선생의 묘. / 사진= 투군

임피역에서 야산이 있는 곳으로 걷다 보면 아담한 농촌마을에 위치한 학교가 있다. 이 학교가 술산초등학교다. 이곳을 지나면 야산이 있는 입구 주변에 술산교회가 있다.

이곳의 야산을 강조하는 이유는 구한말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거유(巨儒)이자 반개화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위정척사(본디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것으로, 외국과의 통상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파였던 연재 송병선(1836~ 1905) 선생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강조되는 이유는 술산리 상전마을의 꽃달메산에 있는 송병선 선생의 음택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 때문이다.

연재 송병선은 누구인가. 그는 고향도 아니면서 이곳에 묻혔을까.

본관이 은진 송씨인 연재는 우암 송시열의 9세손으로, 일평생을 학문 연구와 강학 ·저술 활동을 통해서 쓰러져 가는 국운을 지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구한말 우국지사다. 연재는 자신의 고향인 대전 등지에서 그를 기리는 시설들이 많다.

친동생인 심석재(心石齋) 송병순(1839~ 1912)과 함께 연재학파를 만들어 공유했던 연재.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에 차 서울로 올라가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 파기와 오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답을 기다리다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호송됐다. 이때가 그의 나이 70세였다.
상소가 무위로 돌아가자 그는 1905년 음력 12월 30일, 황제와 국민, 유생들에게 을사오적 처형과 을사늑약 폐기,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세 번에 걸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스물세 번이나 관직에 임명됐음에도 모두 사양했던 그는 무주 구천동과 군산 고봉산 아래 기거하며 평생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비보를 접하고 비통에 빠진 군산의 유생과 그의 제자들은 고향에 묻은 송병선 선생의 시신을 군산 최고의 명당인 술산의 꽃달메산으로 이장하고자 했다.

술산에는 이미 선생의 부인 묘가 있었다.
술산교회 뒤편 야산에 잘 조성된 송병선 선생의 묘는 근래 손을 봐서 단정하다.

묘역 아래에는 인상적인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더 있다.

연재 선생의 몸종 공임의 묘. / 사진=투군
연재 선생의 몸종 공임의 묘. / 사진=투군

선생의 몸종이었던 ‘공임(恭任)’의 묘다. 공임은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통곡으로 날을 지새우다가 10여 일 만에 제 손으로 목을 칼로 찔러 연재의 뒤를 따랐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열여섯의 소녀였다.

# 술산초등학교는

임피면 술산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1937년 5월 22일 4년제 공립 보통학교로 인가됐으며, 1937년 6월 1일 4년제 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96년 3월 1일 술산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이 학교는 2007년 3월 1일부터 2년간 도 지정 환경교육 시범학교로 운영됐다.

# 술산교회

1930년 김관순의 집에 기도처를 정하고 첫 예배를 드린 후 1933년 9월 21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됐다. 1931년 11월에는 술산리 299번지에 예배 처소를 구입했다. 1933년 매요한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첫 학습 세례 문답을 하였으며 1933년 9월 21일 첫 예배당을 완공하여 교회 설립 예배 및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이때 첫 서리집사인 김관순, 채의기, 조해빈이 임직했다. 1956년 두 번째 교회당을 술산리 383에 1975년에는 세 번째 교회당을 건축했다. 1985년 복지회를 발족하였고 1998년 9월 21일 교회 65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고 교회 역사를 편찬, 발간했다.

# 술산초 설립의 공헌자 장영규 선생

옛 임피역 인근에 있는 만석꾼 장영규 선생 저택의 터. / 사진=투군
옛 임피역 인근에 있는 만석꾼 장영규 선생 저택의 터. / 사진=투군

일제강점기의 군옥지역 조선인 최대지주이자 만석꾼이었던 장영규(1872~ 1948) 선생이 이곳 출산 출신이다. 옛 임피역 정면에 있는 기와집을 앞을 우연히 지났는데 한 푯말이 있었다. ‘만석꾼 장영규 저택의 터’란 내용이 담벽에 붙어있었다.

우문이지만 필자는 그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는데 그에 관한 내용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봤더니 몇 가지 의미있는 자료가 나왔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이곳에 담아보고자 한다. 다음은 최규홍 군장대 석좌교수의 언론발표내용을 참조했다.

장 선생은 본래 대야 복교리 사람이었는데 분가해서 김제에서 살다가 1924년 임피역 영업개시와 함께 임피면 술산리로 이사했단다.

자수성가한 그는 일제강점기의 절정기인 1930년대 말 군산과 옥구, 익산, 부안, 익산 등지에 엄청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 토지만도 약 200만평에 달할 정도 부를 쌓았고 원창농장을 운영했다. 당시 도내 조선인 2위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그는 1907년 사립 임피보흥학교(오늘날 임피초등학교 전신)의 설립에 기부하는 등 지역육영사업 발전에 앞장섰다.

그 후에도 그의 육영사업에 헌신했다. 군산사립양영학교와 술산공립보통학교(현 술산초등학교) 등에 희사했는데 특히 당시로는 엄청난 기부였다. 교사와 학교 부지, 교장 사택 등에 쾌척했다.

또 보성전문학교(오늘날 고려대학교)에도 거액을 희사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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