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풍 전 전북일보 전무, 김희원‧ 문치상 전 전북일보 국장 등 도내 언론인 주축
고 김병남 원로언론인, 작고 직전까지 언론인으로 50~60년간 고향서 주로 활약
죽성로는 한때 호남권 최고의 방송국이 있었던 언론의 메카였다.
이곳은 기자‧ 아나운서 등 언론인들이 지역의 각종 소식을 전하기 위해 취재와 방송제작 등에 바쁜 시절을 보낸 역동적인 공간이자 추억의 공간 다름 아니었다.
중소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방송사가 있었고 한때 전주 중심의 언론체제와 경쟁한 군산의 대표 언론기관이었다. 그곳이 서해방송이었다. 물론 이 건물은 이후 고건 전 총리가 군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이용했을 정도로 그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서해방송 개국과 폐국… KBS로 흡수‧ 통합
군산 최초의 민간 방송국인 서해방송(SBC)은 1969년 10월2일 개국했다.
1968년 설립된 서해방송은 같은 해 12월 24일 허가를 받고 1969년 2월 서해방송 설립에 따른 임원 선임이 있었다. 또 죽성동 442번지에 사옥을 마련과 함께 대야면에 송신소를 뒀다.
같은 해 8월28일에 시험 전파를 발사했다. 호출부호는 HLAS, 주파수 680㎑(지금은 장애인방송이 이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다)였다. 죽성동 사옥은 보도국과 녹음실, 숙소, 다방, 예식장 등이 입주했던 4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서해방송은 전남․북과 경상 남․북도, 충청권 일부 지역을 가청 지역으로 해 서해안 일대 도서지방을 모두 영향권으로 뒀다.
첫째는 지역사회 개발에 선도적 작업, 둘째 새로운 윤리관의 정립, 셋째 가청지역에 대한 균점 서비스 등을 기본편성목표로 했다. 또 넷째는 청취자와 스폰서의 공동이익, 다섯째 가정과 직장에 유익한 전파 등에 편성목표를 뒀다.
서해방송은 이러한 편성 방침에 따라 항구도시와 농촌․ 산업지대로서의 특징을 살려 농어민을 위한 생활정보 등에 치중했다.
하지만 지방 방송국의 특성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방송(TBC)과 제휴했다. 특히 독자적인 프로그램 제작이 곤란했으며 가청권에 있는 전북지역에서 대형광고주를 확보하기도 버거웠단다. 군산의 경제적인 규모면에서 취약한 구조를 드러냈다.
서해방송은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 개국에 앞서 1969년 9월19일 서울의 동양방송과 프로그램 제휴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주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새벽의 기상통보를 비롯해 파도를 헤치며, 새마을 교실, 생활정보, AS여론함 등 로컬 프로그램들을 통해 청취자와 호흡을 같이하며 지역 생활정보와 각종 여론 조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힘을 쏟았다.
부문별 편성 실태를 보면 보도(11.3%), 교양(33.1%), 오락(57.6%)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락 프로그램이 약 60%를 차지했고 자체제작으로 충당한 프로그램은 약 40%였다. 전체방송시간의 60% 이상을 제휴방송국인 TBC라디오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또는 패키지로 송출했다.
서해방송은 보도부문에 역점을 둬 전주, 익산, 서울, 대전 등을 비롯한 8개의 분실을 통해 광범위한 취재망을 만들어 농업‧ 수산‧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 발굴에 주력했다.
서해방송은 개국 10여 년째를 지나면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았다.
1980년 언론통폐합의 하나로 KBS로 흡수․통합돼 KBS 군산방송국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 방송국은 헐값으로 KBS에 매각됐다가 나중에 김봉욱 전 국회의원(군산상공회의소 김동수 회장의 부친)이 매입, 전북상호신용금고의 사옥으로 활용했었다.
후에 다른 사람에 넘어간 전북상호신용금고는 전북상호저축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최근 일종의 가교은행인 예쓰저축은행 등으로 변했다.
이후 KBS는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나운동의 옛 KBS 군산방송국으로 이전했다가 방송국 구조조정으로 철수하면서 그 건물과 부지 등을 군산시에 매각, 지금은 어린이 시설과 문화원 건물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해방송 출신 주요 인사들은
군산에 본사로 둔 서해방송 출신들은 최근까지 신문과 방송, 학계, 사업분야 등으로 진출했다.
가장 눈길을 끈 인사는 장경순 전 국회의원이다. 김제출신인 그는 서해방송의 오너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사다.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그는 김제에서 5선 의원으로 선출된 이래 최장기 국회부의장을 거친 군인출신 정치가였다. 얼마 전까지 전북발전과 헌정회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당시 서해방송에는 김진남 초대회장을 비롯한 진기홍 초대 사장, 임남수 2대 사장(체신부차관), 진기풍 부사장, 김병남 보도국장, 이호선 보도국장(전 전주대 교수), 박종열 편성국장 등이 주요 보직을 맡았다.
또 이종성 전 금강방송사장, 박종서 전 연합뉴스 전북지사장, 최정길 전 KBS부장, 박선행(작고) 전 아시아나 여행사 대표, 김종석 서해방송 업무국장 등도 이곳을 거쳐 간 인사들이다.
이 밖에도 김희원 전 전북일보 편집국장, 문치상 전 전북일보 국장, 최낙도 전 국회의원, 오석근 전 사장, 신동우 수필가(전 서해방송 업무부장) 등도 이곳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이들 중에는 현직에 떠나 생을 이별한 사람도 상당하다.
서해방송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사는 서해방송 초대 고 진기홍 사장.
진영 전 행정안전부장관의 부친으로 잘 알려진 진 사장은 60년대 광주체신청장을 지낸 한국체신행정분야의 원로였고 구한말 시대상과 근대 우편제도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 177점을 모아 우정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가 기증한 자료에는 근대우편기관을 창설할 당시(1884년)의 근거 자료인 대조선국 우정규칙과 구한말 개혁파이자 우정총국을 창설한 홍영식이 지은 친필 시문 2점이 들어있다. 또 1894년 동학혁명 때 전라감사 앞으로 전달된 전보 등도 포함돼 있다.
여기에다 대한제국 당시의 우편물 종류와 요금일람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와 1933년의 전화사용료, 1934년 경성중앙전화국이 발행한 전화번호부 등도 눈길을 끈다.
그가 내놓은 자료 중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은 ‘대조선우정규칙’이다.
우리나라가 현대식 금속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그는 이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무려 다섯 차례나 방문했고 당시 일본 잡지에 소장자를 찾기 위해 거액의 포상금을 내걸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래전 전 고인이 된 진 사장은 고창출신으로 진기풍 부사장의 친형으로 자랑스러운 전북인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유지하며 당시의 추억들을 기리고 있단다.
서해방송의 산증인… ‘젠틀맨’ 김병남 고 보도국장
해방 후 군산을 대표하는 언론인은 누구였을까.
군산에서 20여 년을 활동해온 경험으로 볼 때 김병남(작고) 전 언론인이라 생각한다.
서해방송에서 보도부장 및 보도국장을 거친 그는 전북일보와 전라일보 등에서 활동한 대표 전북원로언론인 중 한사람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전북일보 기자로 첫발 내디딘 후 방송과 신문사를 오가며 50여 년 동안 활동해왔다.
고향에서 활동하며 지역발전에 전력했을 뿐 아니라 도내언론 진흥에도 앞장섰던 대표적인 언론인 출신이다.
얼마 전(2020년 12월)에 생을 이별한 그는 영원한 언론인이었고 지역에 남긴 족적도 적지 않았다. 도내 주류 언론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을 뿐 아니라 끝까지 고향에 남아 지역언론발전에 기여했던 정통언론인이었다.
그는 생전에 서해방송 창사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한 ‘나의 서해시절’에 잘 녹아 있다.
그는 서해방송 개국 2개월 앞둔 69년 8월1일 9년간 정들었던 전북일보를 떠나 방송인으로 옮긴 계기와 감회, 당시 사회상 등을 담은 소중한 내용을 사보 ‘나의 서해시절’에서 담았다.
다음은 이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방송의 문외한인 자신이 방송국에서 일하자는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방송보도가 본질적으로 신문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 였다.
당시 콜레라가 만연되어 개국은 예정일 보다 늦어졌고…(중략) 개국일인 1969년 10월2일 정오부터 정규 뉴스가 시작됐고 보도부는 자신의 주관 아래 보도제작 프로인 뉴스 버라이어티의 방송준비와 서해방송의 서비스 에어리어 등을 소개했다는 내용이다.
TBC의 1주일씩의 실습을 통해 방송에 몸을 담았지만 경력자들의 도움과 함께 장비가 없어 고통 받았던 애환을 담았다.
방송시간의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한 긴장감이나 당직 기자의 업무 펑크 등의 에피소드까지 소상히 적어 오늘에 전했다.
여기에는 1969년 10월과 11월 익산(당시 이리시) 목재상사의 화재사건 등 연이은 화재사건 취재기와 서해방송의 보도는 가청구역의 이익과 소금의 역할을 해보자고 다짐했던 언론인으로서의 직업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전에 그(서해방송 당시 보도국장)는 “그 당시 방송인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어려운 시절임에도 정말 행복한 시기였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서해방송시절을 즐겨 얘기했었다.
필자도 지역의 한 언론사에서 그분과 약 8년 가까이 연을 맺었는데 후배들과 솔직담백한 대화는 물론 애정이 넘친 노신사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