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믿을 수 없는 희한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1979년, 타락했던 그해 10월이 지나고 찬바람이 목을 움츠러들게 했던 늦가을, 최관수는 급기야 군산상고 감독직을 사임한다.
시민과 팬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임 이유는 ‘목 디스크’. 그대만 해도 생소한 병명으로 사람들은 ‘디스크’가 무슨 병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래는 “최 감독을 떠나보내며, 하늘이 다 야속했다”고 말하는 이용일 전 KBO 총재 대행의 회고다.
“적당히 살살 좀 하지··· (한참 침묵하다가). 최관수 얘기는 할수록 가슴이 아파."
"군산상고가 1976년 대통령배 우승하고 얼마나 있다가 기업은행 전·남북 지점대항 축구대회가 열렸지. 직원들 친목을 다지는 친선경기니까 적당히 해도 되는데,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그만 철봉에 부딪혀 쓰러진 거야."
"얼마 후 후유증이 나타나더군.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니까 파킨슨병이라는 거야."
"어떻게 해. 감독 10년째 되는 해(1979) 감독직에서 물러났지.”
최 감독은 군산 시민의 모금 운동과 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는다.
이후 기적적인 회복을 보여 산책도 하고 부둣가로 바람도 쐬러 다녔다.
그러나 예전처럼 활동은 못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더듬는 등 병세는 날로 깊어갔다.
남에게 도움만 받을 수 없었던 그는 1983년 생계를 위해 군산시 죽성동에 전세를 얻어 ‘홈런세탁소’를 개업한다.
최연소 국가대표 출신 명장 최관수가 제2의 삶을 시작한 홈런세탁소.
다행히 일감은 많았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였다.
군산상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세탁소를 개업했다는 소문이 금강 건너 충청도 장항, 서천 지역까지 알려졌던 것.
그는 손님들이 가져온 양복에 주소와 이름이 적힌 딱지 붙이는 작업을 낙으로, 또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병마와 싸운다.
역전의 명수가 탄생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하는 최 감독. 그는 1985년 여름을 앞두고 병세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자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군산상고를 찾아간다.
황금사자기 대회를 겨냥, 투수코치를 자청했던 것.
그러나 며칠 후 뙤약볕 아래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지역 야구인과 독지가들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등 해태타이거즈 중심타자로 성장한 제자들은 하태문, 김용배, 유희명, 최병태, 나창기 등 실업팀에서 활약하는 옛 야구부 동료들과 모교 운동장에서 ‘보은경기’를 열고 사인볼을 팔아 치료비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최 감독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
최관수 감독의 뜨거운 야구사랑은 투병생활 중에도 식을 줄 몰랐다.
1996년 여름, 그는 대화가 어렵고 거동이 불편함에도 군산상고 운동장에 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연습을 지켜보다가 운동장 바닥에 ‘찬스 때 대타 활용을 잘하라!’고 써서 제자(나창기 군산상고 감독)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토록 야구에 집념이 강했던 그는 1998년 3월 7일 타계,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야구 인생을 마감한다.
아래는 양희철(81) 전 전북체육회 부회장의 회고다.
“그때 내가 전라북도 체육대상 부상으로 받은 상금 500만 원이 있었지.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최관수 감독 부인이 세탁소도 그만두고 삯바느질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돕기로 했지."
"그때는 내가 볼링장도 운영하고 잘 나갈 때였잖아. 체육인으로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입원과 치료비는 얼마나 드는지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알아봤지.
"며칠 후 350만 원이면 가능하다고 연락이 오더군. 곧바로 최 감독 부인에게 돈을 전달했지."
"그런데 얼마 후 최 감독이 덜컥 죽어버렸네. 부인은 병원에 가자고 하고, 최 감독은 안 간다고 우기고 싸웠나 봐.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상을 치르고 최 감독 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어."
"‘애기 아빠 병 고치라고 주신 돈이지, 저희 생활비를 주신 게 아니니 돌려드리겠다’는 거야. 얼마나 감동했는지. 살면서 그렇게 착하고 고지식한 부부는 처음 봤어. 오죽했으면 맹자의 성선설을 생각했겠느냐고."
"아무튼,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야···.”
양희철 부회장 말마따나 군산의 야구팬을 비롯해 예술인과 체육인들도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라는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은 군산상고를 찾는 외지인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얘긴데, 지역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도 군산상고 입구에 ‘최관수 감독 흉상’을 제막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최관수 감독 편 끝)
'조종안 기자의 군산 야구 100년사'를 마치며…
'조종안 기자의 군산 야구 100년사'를 '투데이 군산'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작년 2월14일입니다.
약 1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늘 '영원한 군산인 고 최관수 감독④'편을 마지막으로 '조종안 기자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조종안 기자의 야구 100년사'는 지금까지 총 102편이 게재됐습니다.
'투데이 군산'이 창간한 이후 최대 연재물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귀중한 기사를 매주 꼬박꼬박 보내주신 조종안 기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옆에서 지켜 본 조종안 기자의 군산 야구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군산 야구’의 조각을 발품을 팔아가며 하나하나 끌어 모아 정리한 군산의 최초 인물로 기록됩니다.
단순히 야구만 좋아해서는 할 수 없는 지역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의 소박한 꿈은 민선 7기 강임준 시장의 공약인 ‘군산 야구 박물관 건립’이 빠른 시일안에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군산 야구가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투데이 군산'도 앞으로 '군산야구 박물관 건립'에 많은 관심을 가질 계획입니다.
다시 한번 조종안 기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 많은 관심을 보여 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올립니다.
/투데이 군산 ‘뉴스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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