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은 군산상고 시절 봉황대기 대회와 전국체전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국제대회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발휘,타력·수비력·주력 등을 두루 갖춘 유망주로 인정받는다.
각종 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재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름방학 끝나기 무섭게 전북 지역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와 전국 유명 대학에서 스타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아래는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가 군산상고 이진영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소개한 신문 기사다.
“연고 지역 고교야구 저변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쌍방울은 공·수·주 3박자를 갖춘 군산상고 외야수 이진영 외엔 대안이 없다고 판단,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 9월 23일 치 <경향신문>)
“쌍방울 레이더스는 16일 신인지명 1차 1순위로 뽑은 군산상고 외야수 이진영과 계약금 1억 원, 연봉 2천만 원에 계약했다.”
-(1998년 11월 17일 치 <한겨레>)
지방의 고교 야구선수들은 대부분 서울의 명문대학 진학과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도 이진영은 곧바로 프로를 택했다.
전북 연고팀 1차 지명을 받았다지만 ‘대학 포기하고 프로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후회가 안 되는지’ 궁금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3학년 여름방학 앞두고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죠."
"대학이냐 프로냐, 갈등이 있었지만 쉽게 결정 내렸습니다.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대학보다는 내가 필요한 팀, 즉 지명하는 구단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들이 모 대학팀 야구부장과 식사도 하고 봉투(스카우트비)도 받았다고 하시기에 돌려드리라고 했죠."
"지금 생각해도 그때 선택이 옳았다고 봅니다.”
쌍방울 마지막 시즌 함께한 신인 선수
고교 시절 외야수와 시속 140km대 중후반의 직구를 뿌리는 좌완투수로 주목을 받은 이진영은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 타자로 전향한다.
프로입단 첫해 성적은 65경기에 출전 190타수 49안타(타율 2할 5푼 8리) 13타점 홈런 4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쌍방울의 마지막 연고 지역 1차 지명 대상자이자 최후의 신인 선수이기도 하다.
“솔직히 투수보다 타자가 성향에 맞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프로(쌍방울)에서 처음 만난 김성근 감독께서 부상인 저를 한두 달 테스트해 보더니 타자를 하라고 권하셔서 타자(외야수)로 활약했죠."
"입단 당시에는 최고 구속 150km/h에 이르는 빠른 볼이 주 무기였거든요."
"김 감독님도 투수로 쓸지 야수로 쓸지 마지막까지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쌍방울은 외환위기(IMF) 후폭풍으로 재정이 열악해졌어요."
"연습 때 부러진 방망이를 모아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동계훈련을 하고,경기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거든요."
"미래가 불투명하니까 계획을 짜기보다 불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결국, 쌍방울은 1999시즌을 끝으로 해체되고 SK 그룹으로 넘어갔죠. 저도 2000시즌부터 신생팀 SK 와이번스 선수로 뛰었습니다.”
SK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진영은 슬럼프에 빠진다.
2000시즌 통산 안타 72개(2할 4푼 7리), 2001시즌 90개(2할 8푼) 등 2년 연속 두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것.
그러나 2002시즌이 시작되면서 타력이 살아나기 시작, 매년 세 자릿수 안타와 3할대 타율을 유지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