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우들과 아름다운 추억 없는 게 가장 아쉬워”
이진영(李晋暎)은 1980년 초여름 전북 군산시 신흥동에서 큰아들(2남)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가정교육도 철저히 받았다. 엄한 가정교육 영향으로 항상 과묵했으며 어른을 깍듯이 대했다.
1987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저는 친구 어머니가 운전하는 승용차도 미안해서 못 탈 정도로 내성적이었죠."
"114 누나(안내원)들 대하기 민망해서 전화도 못 하고…, 그래서 치킨이나 자장면을 못 먹을 때도 있었어요."
"먹고 싶으면 어머니에게 시켜달라고 해서 먹었는데, 어머니가 짜증내시면 꿍꿍 앓으면서 참았거든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몽니 부리는 선배에게 ‘맞짱’ 뜨자고 대시해서 화해할 정도로 용기도 있었는데···."
"결국 프로에 들어와 ‘말발’도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습니다.”
야구 배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손에 쥐기 시작한다.
야구부에 들어가야겠다는 자신의 강력한 의사 표시와 함께 야구에 적합한 체격 조건을 갖춘 그를 눈여겨본 야구부 감독(강병원씨)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들을 설득한 것.
첫 포지션은 투수. 학창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격려는 군산상고 에이스와 국가대표를 거쳐 오늘의 이진영이 있기까지 큰 힘이 됐다.
야구 꿈나무 이진영의 롤 모델은 당시 전북 연고팀 쌍방울 레이더스 거포 김기태 선수와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 선수.
그들이 TV 화면에서 호쾌한 장타를 날리거나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 도는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얀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선수를 향한 동경심은 ‘나도 선배들처럼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돼야겠다!’는 다짐과 기본기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고된 연습에 짜증도 나련만 야구가 이상하리만치 재미있었단다.
연습게임이지만, 상대 타자의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거나 장타를 날렸을 때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학창시절 교우관계에 대해 그는 “눈만 뜨면 연습하고, 시합에 대비하느라 급우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만한 시간이 없었던 게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