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 야구와 황금사자기 대회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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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 야구와 황금사자기 대회 인연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5.25 08:34
  • 기사수정 2022-01-14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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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금사자기/출처=조종안 기자
항금사자기/출처=조종안 기자

광복 후 전국규모 고교야구대회는 1946년 9월 <자유신문사>가 주최한 제1회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하나뿐이었다.

첫 대회 이후 해마다 5월~6월에 열렸으며 1953년 대회(8회)부터 <조선일보>가 주최하면서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로 명칭이 바뀐다.

당시 야구인들 사이에는 전국대회가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니 하나 더 만들자는 의견이 오갔고, 곧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 후 서상국 야구협회장, 이영민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 이길용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등의 주도로 1947년 여름 황금사자기가 햇빛을 보게 된다. 혼란기여서 선수 중에는 애아버지 같은 나이배기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길용 기자는 1930년 4월 본사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조선야구사>를 1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 말소사건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한국 체육기자 선구자로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은 그의 피랍 39주년인 1989년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제정, 매년 한 명씩 수상해오고 있다.

황금사자기 1회대회 입장식 광경(1947년 8월22일 동아일보)
황금사자기 1회대회 입장식 광경(1947년 8월22일 동아일보)

 

1947년 여름 황금빛 사자가 첫 포효를 터뜨린다.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제1회 황금사자기 대회가 개막한 것.

당시 공식 명칭은 ‘제1차 전국 지구대표 중등야구쟁패전’이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20년대 창설된 4구락부 연맹전을 모태로 출발한 이 대회는 전국을 서울, 경기, 강원, 충남(충북 포함), 전남(제주 포함), 전북, 경북, 경남 등 8개 지역으로 나눠 지역 예선이나 추천을 받아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개막전은 8월 20일 강원중-경남중이 가질 예정이었으나 강원중이 뜻밖의 화재로 불참. 경남중의 기권승이 확정된 데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하루 연기된다.

21일 오후 1시 동아일보사 최두선 사장의 개회사와 김동성 조선 야구협회 회장의 축사에 이어 군산중 구한섭 주장의 선수대표 선서로 개회식을 마치고 2시 35분 군산중-동산중 대결로 플레이볼 되었다.

황금사자기 개막전 첫 투구는 인천 동산중 박현식에 의해 뿌려졌고, 첫 타자는 군산중 최문길 선수였다.

군산중 선공으로 시작한 이날 경기는 뜨거운 함성과 열기 속에 2시간 10분에 걸쳐 치러졌다.

동산중이 1회에 2점을 선취하자 군산중이 2회와 4회에 각각 한 점씩 뽑아 동점을 만든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동점 번복만 3차례. 9회까지 4-4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연장 10회 말 동산중 박현식의 안타와 윤태섭의 보내기 번트, 황우겸의 스퀴즈번트 성공으로 군산중이 1점을 내주면서 4-5로 아깝게 패한다.

군산중 진용은 정윤기(감독), 황 동·최문보(코치), 최명보(투수), 서병철(포수), 조상기(1루수), 이순철(2루수), 최문길(3루수), 최동현(유격수, 훗날 군산상고 초대 감독), 이문갑(우익수), 구한섭(좌익수·주장), 김우효(중견수), 후보 선수 5명(김진복, 육기술, 노재욱, 김양수, 최성현)으로 짜여 있었다. (최문보 코치와 최명보 투수는 형제였음)

사람들에게 ‘관중의 애간장을 녹였던 경기’로 평가받았던 군산중-동산중 대결은 1972년 7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펼쳐진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을 떠오르게 한다.

제26회 대회 결승전도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 연기해서 열렸고, 군산상고가 9회 말 극적인 역전승(5-4)을 거뒀으며, 두 경기 모두 황금사자기 역대 명승부 5선에 들어서다.

훗날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킨 최관수 감독이 동산중(동산고) 출신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는 1948년 제2회 황금사자기 대회는 호남지방을 휩쓴 30년 만의 대홍수로 전·남북 및 충·남북 지역 4개 팀이 불참한다.

그러나 군산중학 야구팀은 그해 우수중학 팀으로 초청받아 서울 경기중, 인천 동산중, 부산 경남중 등이 참가하는 전국 4개 도시 우수중학 대항전에 출전하여 우승한다.

절치부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군산중은 제 3회 황금사자기 대회(1949년 10월 1일~4일)에 전북 대표로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경기도 대표 인천 동산중에 1-3으로 패한다.

당시 진용은 정윤기(감독·부장), 김태준(코치), 이완동(주무), 선수 정흥태(투수), 김창인(포수), 조춘환(1루수), 이태환(2루수), 김상훈(3루수), 최문길(유격수), 김재현(좌익수), 박인안(중견수), 김재권(우익수), 후보 선수 김진수, 장명석, 김양수 등이었다.

전국 지구대표 중등야구 쟁패전은 한국전쟁(1950~1953)으로 4년 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1954년(8회) 더욱 우람찬 모습으로 웅비한다.

‘고교야구대회’(1962년 16회 대회부터 ‘황금사자기 대회’로 개칭)로 명칭이 바뀐 것. 전쟁과 학제 개편(중·고 분리)의 혼란 속에 대부분 야구부가 해체됐기 때문이었다.

군산중학교도 1951년 군중, 군고(각 3년제)로 분리되면서 야구부가 중학교에 존속됐으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군산은 학생야구 불모지로 전락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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