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그의 잔은 그에게 족하다 6-3
(…6-2에 이어)영화가 상영되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도둑질하려는사람처럼 얼굴이 심하게 후끈거렸다. 잘못된 일이 아닌데도 훔쳐보는 영화처럼 가슴이 뛰었다. 은밀하게 또 다른 광재와 만나기 위한 시간이어서 그럴 수 있다는 것 빼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심장 박동 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번 길게 호흡을 내뿜었다.
첫 화면부터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놀이패의 장단이 어우러지면서 빙글빙글 상모가 돌아갔다. 그는 현기증이 솟았다. 어깨춤이 절로 날 듯싶은 장단이 오래전의 시간을 물고 늘어졌다.
공길이 역을 맡은 배우는 광재를 많이 닮았다. 하마터면 광재야! 하고 그는 가슴 깊숙이 묻었던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부를 뻔했다. 영화 속의 공길은 매력적이었고, 타고난 외모로 인해 시달림을 겪고 있었는데 모든 면이 광재와 비슷했다. 광재를 닮은 그가 요염하게 미소 지으며 추억을 되살려 내었다. 광재는 화면과 함께 아득한 골짜기에서 슬픈 얼굴로 떠올랐다. 광재는 그의 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알싸한 아픔으로 다가온 그 이름을 그는 몇 번이고 지웠다. 깨끗이 지웠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었던 이름이었다.
광재는 그가 대학 시절에 만난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곱고, 섬세했으며 여린 심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충실했던 여성적 성향이 두드러진 남자였다. 매력적이고 특이하게 예쁜 광재의 외모는 동아리에서도 유난히 눈이 띄었다. 그의 눈에 자주 띄었던 것은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돋보이는 외모 탓이겠지만 어쩌면 주위에서 자주 서성이고 있어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는 광재의 고백을 들은 나중에야 그런 사실들을 알았다. 눈을 들면 언제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던 광재 역시 이미 그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억제된 욕망을 느꼈던 걸 수도 있었다. 동물적 감각이 텔레파시로 숨겨진 본능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숙명적으로 엮이게 된 광재의 기억들은 버리려 노력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헤어진 이후에도 끝까지 남아 기억의 창고에 수북하게 쌓였다.
영화가 진행되는 중에도 그의 눈에는 공길이만 보였다. 공길이는 바로 광재였으며 공길의 눈빛과 말투, 그리고 손짓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광재는 영화 속에서 공길이로 살아나 예전처럼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화면의 장면들은 억눌러 온 아픈 과거를 일깨우며 숨이 막히게 설레던 시간들을 되살렸다.
광재가 보고 싶었다. 미칠 듯 보고 싶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절실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솟구치면서 공길의 눈에 서린 아련함이 가슴을 할퀴었다. 안에서만 삼키던 울음이 목울대로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광재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같은 마음이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다. 공유할 수 있지만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가까스로 억눌러 온 감정을 무너뜨리면 자신을 제어할 힘마저 잃게 될 것이었다. 그건 사소한 게 아니라 감당하기 버겁고 힘든 과제였다. 어려운과제는 덮는 게 옳았다.
친구니까 당연히 좋지, 그는 미련이 묻어나지 않도록 광재의 말을 잘랐다. 어떤 의도로 고백하는지 꿰뚫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허용할 수 없었다. 감내할 여력이 없었던 그는 광재의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과감히 외면해야 했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장남인 그는 강씨 가문의 3대 독자 외아들이었다. 절대적 사랑을 받는 아들이 감히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가족과 부모님, 친척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광재가 온전히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어도 평생을 남자와 함께 살아가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광재는 그가 정한 경계선을 넘어 칙칙하고 어두운 세상에 기거할 사람이었다. 사랑 때문에 혈연까지 외면할 배짱이 당시엔 솔직히 없었다. 하긴 지금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긴 했다.
친구라는 이름 말고, 좀 솔직해질 수 없느냐고 광재가 말끝을 흐렸을 때 솔직함이 스스로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그는 불가능하고 힘든 삶을 살기 싫었다. 사회적 규칙에 반하는 행동에는 용단이 필요한데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비겁한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진심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보다 더 큰 이유는 타인이 그의 성향을 알게 될 때 경멸이 담긴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런 것들이 더 큰 고민이며 과제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의 말에 광재는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엔 다 그렇다고, 이해한다고도 말했다. 광재 역시도 아직 갈등 상태라며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지만 예전보다 과감해졌다. 사랑은 어떤 장애라도 초월한다고 속삭이며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광재는 그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끈질겼다. 달콤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시선을 수시로 던지며 애정의 표현에 적극적이었다. 어느새 그는 광재의 삶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생의 동반자로 살자고 되뇌며 그에게 몰입하는 광재의 사랑은 어딘지 편집증적인 냄새를 풍겼다.
광재는 학창 시절 내내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타인의 눈총에도 상관없이 그를 끌어안고 몸을 더듬었다. 광재의 야릇한 시선을 받을 때면 그는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광재의 손이 닿을 때마다 흥분되었으며 황홀했다. 때론 같이 뒹굴고 싶어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그는 선을 넘는 상황에 몹시 당황했다. 감정을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그가 정한 규칙은 광재의 손길을 따라 허공으로 증발했다. 까딱하다간 두 사람이 함께 휩쓸려 나락으로 추락할 위험성이 다분했다.
많은 여자들이 광재의 곁을 맴돌았다. 여자들은 광재의 빼어난 외모에 반할 뿐이어서 다른 것에는 관심 없었다. 그에게 엉켜 있는 광재를 떼어내지 않는 그가 싫었던 여자들은 그를 심하게 질투했다. 그녀들은 광재가 그에게 보이는 눈꼴 사나운 행동들을 못 견뎌 했으므로 거리를 두라고 충고하기 시작했다. 광재의 추종자들에게 경쟁자로 보였던 그는 시기로 눈먼 여자들로 인해 자칫 정체성이 드러날까 걱정이었다.
광재의 사랑은 언제나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불나방 같은 열정은 그에게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광재는 자칫 그의 생을 파괴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이라도 진흙탕 속으로 끌려가 함께 처박힐수는 없었다. 광재에게 그는 연인이었으나 그는 아직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살아도 좋다는 과잉된 애정을 허락할 수 없는 게 그의 한계였다.
만약 광재를 용납하게 된다면 영원히 놓지 못할 것 같았다. 소신도 눈물겹게 쌓은 인내심도 빛을 바랄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광재에게 얽매어 세상의 숱한 이목을 감당하며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세상을 거스르며 사는 게 두려웠고, 광재처럼 세상과 맞서 싸울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과감한 행동을 저지르거나 고수해 온 룰을 깨트리는 짓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통제 불능상태가 되기 전에,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불안에 떨기 전에 제자리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쉽더라도 그가 정한 영역을 광재가 침범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절박한 위기의식이 광재를 차단해야 한다고 충동질했다. 광재를 벗어나기 위해선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금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