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한국 야구 여명기②
일제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하는 통감정치 기간(1906~1910)에 결성된 스포츠 단체는 10여 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스포츠 불모지나 다름없던 나라에서 이 같은 비약적인 발전은 당시 정치·사회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술국치(1910) 전후 운동경기, 특히 야구는 서구 문명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항일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공포 후 서울에서는 미국, 영국 등 외국인들의 야구 경기가 열렸다.
인천 등 항구도시에서는 캐치볼을 하는 외국인 선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야구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는 2002년 제작되어 야구팬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YMCA 야구단>에도 잘 묘사되고 있다.
1896년 4월 25일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 경기(미국인팀-미 해병대팀)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미 해병대팀이 1점 차로 승리하였다.
이는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치른 최초 야구 경기로 기록된다.
그해 5월 2일에는 훈련원에서 미국인팀-영국인팀 경기가 열려 영국인팀이 4점 차로 패하였다.
그해 6월 23일 치 <독립신문> 영문판은 25일(화) 오후 3시 훈련원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미 해병대-미국인팀) 예고 기사를 싣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서재필 박사가 제이 손(Jai sohn)이라는 미국인 신분으로 미국인팀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한 사실이다.
서 박사가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나 기록에 나타난 최초 한국인 야구선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는 미 해병대팀이 23-16으로 승리하였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끼리 펼쳐진 최초 야구 경기는 1906년 3월 15일 훈련원(조선 시대 무과 시험장이자 군사훈련장)에서 개최된 황성 YMCA 야구단-덕어학교(독일어 학교)의 일전이었다.
경기 결과는 덕어학교가 3점 차로 승리.
이날 경기는 장비와 포지션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엉성했고, 선수들은 갓만 벗었을 뿐 무명고의적삼에 짚신 차림이었다.
경기장도 훈련원 넓은 마당에 선을 그어 다이아몬드를 만들었고, 게임도 지금처럼 9회까지 진행하지 않았다.
투수 플레이트(투수판)도 없었으며, 루심이나 선심이 없이 심판관(주심) 한 사람이 경기를 진행하였다.
그라운드가 고르지 못해 선수들이 자주 상처를 입었으며 주자가 슬라이딩(도루)도 할 수 없었다.
당시엔 총알 같은 안타를 치는 타자보다, 공을 높이 띄우는 선수가 강타자로 인정받았다.
공을 높이 띄우면 수비수들이 영락없이 못 잡았으니 진루율이 100%에 가까웠다는 것.
또한, 객석이 없는 관계로 관중이 많을 때는 심판과 선수들이 경기장을 정리하면서 시합을 치르는 등 그야말로 '동네 야구' 수준이었다.
시합하다가 중간에 운동장을 정리하느라 경기 소요 시간이 길어졌다.
배트와 포수용 미트는 한 개를 가지고 양 팀이 돌려가면서 사용하였다.
외야수는 좀처럼 글러브 맛을 보기 어려웠고, 맨손으로 공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파울볼에 맞아 다치는 사람이 늘면서 야구는 축구보다 위험한 운동이라는 의식이 확산된다.(계속)
조종안 기자는?
조종안 기자는 늘 발품을 판다.
현장 곳곳을 누비며 쓰는 그의 기사는 그래서 맛깔난다.
관념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현장에서 다양한 취재거리와 호흡하며 소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취재 열정과 집념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은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인쇄된 여러 권의 책이다.
이번에 '투데이 군산'에 새롭게 내용을 보완해 연재하는 [군산야구 100년사(2014)]를 비롯해 [군산항에 얽힌 이야기들(공저/2017)] [군산 해어화 100년(2018)] [금강, 그 물길 따라 100년(2018)]이 대표적이다.
그를 대변해주는 논문도 꽤 있다.
2013년에 군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한 [기록으로 보는 이영춘 박사-그가 겪은 고난 10가지]등은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라도 권번 문화예술에 대한 가치제고(2018)]라는 주제발표도 대표적인 그의 열정과 집념의 산물이다.
그는 2005년 인터넷신문 [플러스코리아]에서 처음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인터넷신문 [신문고 뉴스] 논설위원 및 편집위원을 지냈다.
지금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 중이다.
한국전쟁 발발 때 세상의 빛을 봤다는 그가 올해로 일흔의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취재 현장 곳곳에서 만나본 그는 여전히 젊다.
/'투데이 군산' 뉴스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