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은 ‘공치기’, 부산은 ‘찜뽕’, ‘찜뿌’
국민 대부분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50~60년대.
미국에서 원조해준 잉여농산물로 끼니를 겨우 연명했던 그때는 영어 발음도 고달프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이들은 공치기할 때 퍼스트 베이스(1루)를 ‘일페스’, 세컨드 베이스(2루)는 ‘이페스’라 하였다.
야구 배트를 ‘빠~따’, 홈런을 ‘호무랑’이라 했고, 축구 골키퍼(keep)를 ‘키~빠’라 불렀다.
이처럼 센 발음 역시 일제강점기 교육을 받아 트럭을 ‘도라꾸’, 택시를 ‘다쿠시’, 클럽을 ‘구락부’, 밀크를 ‘미루꾸’로 발음하는 어른들에게 고스란히 물려받은 일종의 일제 잔재였다.
권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에서 느껴지듯 당시 군산은 권구(공치기)가 유행했다.
동네 어른들은 ‘주먹 야구’ 혹은 ‘세카이쥬’라 하였고 아이들 사이에는 ‘공치기’가 두루 쓰였다.
열 살이 되도록 야구공이나 경기를 구경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세카이쥬’라 하였다.
어쩌다 찜뽕, 짬뽈, 하리 등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널리 통용되지 못했다.
부산이 고향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감독과 파키스탄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황동훈(65) 대한야구협회(KBA) 기술위원 추억담을 들어본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부산은 야구의 도시죠. ‘권구’는 처음 듣는 놀이 이름이군요."
"고무공을 주먹으로 치는 놀이를 부산에서는 ‘찜뽕’, ‘찜뿌’라고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몰캉몰캉한 고무공으로 ‘찜뽕’을 하고 놀았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찜뽕’을 하다가 상급생이 되어 야구부에 들어가 정식으로 야구를 하는 게 순서였죠. 그렇게 기초를 다진 덕으로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고, 실업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어요. (웃음)”
이복웅(70) 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은 “권구는 일본식 이름이다.
나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금암동 공설운동장에서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말랑한 고무공으로 공치기를 하고 놀았다.
고무공을 살짝 띄워 주먹으로 쳤을 때 멀리 날아가면 그야말로 통쾌했다.”라며 “베이스와 베이스 사이에 파울선을 그어놓고 했는데, 경기 방식은 야구와 비슷했고, 베이스는 책가방이나 주변의 돌로 표기했다.”라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이 원장은 “희열과 스릴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야구(공치기)는 축구와 더불어 모두가 즐기고 좋아하는 놀이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세계(世界·세카이)를 돈다.
즉 네 베이스를 도는 놀이라고 해서 ‘세카이쥬’, 혹은 ‘공치기’라고 했는데, 부산 지역에서 찐뽕, 짬뽕, 하리 등으로 불리었다니 그 이름이 재미있다.”라고 덧붙였다. .
세월의 변화에 따라 공치기도 진화한다.
1960년대가 시작되면서 시멘트 종이와 신문지로 만든 글러브를 사용하는 아이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
놀이문화 발전으로 공도 말랑말랑한 고무공에서 탄력 있는 테니스공으로 바뀐다.
1962년에는 군산 시내 초등학교 네 곳에 야구부가 창단된다.
이후 모교 유니폼 차림의 야구 꿈나무들이 거리를 활보하였고, 야구 선수 지망생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어린이들에게 지구력과 조정력, 집중력 등을 길러줬던 공치기.
밥만 먹으면 비좁은 골목이나 차가 뜸한 대로변, 흙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 등에 모여 마냥 즐겨했던 공치기는 TV 보급이 농어촌 지역으로 확산되고, 전자오락기가 등장하자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더니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추억의 놀이가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