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說'] ‘질곡의 역사’ 잘 견뎌낸 전통명절 ‘설날’(1)
오는 10일(토)은 민족 최대 명절인 ‘설(설날)’이다. 설날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차례지내고,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 피우며 부모에게 세배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풍요롭다. 한 세대(30년) 전만 해도 흔한 광경이었는데 먼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아 유감이다.
예전엔 이즈음을 ‘대목’이라 하였고, 설날 2~3일 전부터 ‘단대목’이라 하였다. 설날이 언제 어떻게 전통 명절로 정착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음력 1월 1일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차례 지내고 세배를 다니는 등 민족의 최대 명절로 지켜왔다.
아름다운 풍습과 전통을 자랑하는 한민족, 한때는 친일했던 대통령이 '절약'과 '이중과세'를 명분으로 설날 아침에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공무원들을 출근시키면서 양력설을 쇠라고 강권했다. 승진, 전근 등 공무원들의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설날이 가까워지면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일제 식민치하 36년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의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군산 지역 주민들은 민족의 얼이 깃든 다채로운 민속놀이로 결속력을 다졌다. 옛날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겠지만, 조상들이 분신(分身)처럼 지켜온 설날이 국적 없는 상업주의에 밀려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머무는 게 못내 아쉽다.
일제강점기에는 섣달그믐 일주일 전부터 떡방앗간을 열지 못하게 하였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설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고향 하늘과 흙으로 이루어진 몸이 부모를 찾아뵙겠다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끈질긴 민족성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조상들은 설날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설날에 세배함은 인정 두터운 풍속이니/ 새 옷을 차려입고 친척 이웃 서로 찾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닐 적에/ 설빔 새 옷이 와삭 버석거리고 울긋불긋 옷차림이 화려하다/ 사내아이 연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요/ 윷놀이 내기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인사드리니 떡국에 술 과일이 제물이로다. (아래 줄임)” (조선시대 <농가월령가 ‘정월령’>에서)
민족의 얼 깃든 다채로운 놀이 즐겨
우리나라는 중국 ‘하대(夏代: BC23~18세기)’의 역법(曆法)을 따라 음력 정월 초하루를 설로 삼아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 만물이 소생하는 음력 정월이 세수(歲首)로 가장 적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설날은 한 해의 첫날을 뜻한다고 해서 연두(年頭), 세수(歲首), 원단(元旦) 등으로 불렸다. 이날은 자손들이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를 지냈다. 아침에 떡국을 먹은 자손들은 부모의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며 세배를 올렸다.
자녀와 손자·손녀에게 세배 받은 부모는 건강을 빌어주거나 소원을 성취하라는 의미로 덕담을 건넸고, 앞으로 돈을 많이 벌라는 뜻으로 세뱃돈을 주었다. 요즘에는 현금 대신 문화상품권이나 도서상품권을 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추세다.
설날 아침 부모에게 세배가 끝나면 일가친척과 마을 어른, 친구 부모, 스승 등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당시엔 정월 대보름 안으로 세배를 다니면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어른들은 친구 사이에도 '만사형통'을 축원하는 덕담을 정월 내내 주고받았다.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은 연날리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널뛰기, 투호놀이, 제기차기, 윷놀이, 고누놀이 등을 하였다. 이러한 놀이는 봄까지 이어졌으며 딱지치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고누놀이 등은 1년 내내 즐겼다.
어른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풍물패(풍장꾼)를 조직, 마을 곳곳을 돌며 악귀를 쫓아냈다. 지신밟기, 고싸움놀이, 강강술래 등 지방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는데, 이러한 놀이는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고, 복을 빌거나, 건강을 소망하는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계속)
※위 원고는 필자가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디지털군산문화대전>(2012) 등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