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마흔의 여자 9-7

2022-12-02     김선옥

(…#9-6에 이어)

이별 통고를 받고 나서 미순이는 내가 느꼈던 황당함을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멀리 사는 나를 수소문하여 일부러 찾아온 미순이는 내게 그와의 이별을 알렸다.

"주호가 떠났어.”

“유감스럽네. 그 말해 주러 일부러 온 거야?"

“너를 찰 때 그 자식이 쓰레기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형편없는 자식"

“네 남편이야."

“지금은 아니지. 더러운 자식 지 새끼 고치려고 뼈 빠지도록 모아 둔 돈까지 훔쳐서 달아난 사기꾼 자식이니 말하면 뭐하겠어. 금수만도 못한 새끼”

미순이는 거품을 물며 이를 갈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쥐어뜯는 그녀가 측은했다. 신랄하게 욕을 뱉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동안 쌓였던 주호에 대한 미순이의 분노를 헤아렸다.

"어디서 만나기만 해 봐. 대갈통을 부셔 놓을 테니까. 밟아 죽여도 시원찮은 새끼."

그녀는 내 앞에서 주호의 배신에 울분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애써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주호와 함께한 지난 시간들을 미련 없이 잊었다. 주호를 빼앗아 간 그녀를 미워했으나 그녀의 고단한 삶을 알고, 미움을 삭혔다.

미순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내겐 한 터럭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바닥에 짓이겨진 성적 모멸감만으로도 나는 이미 주호에 대한 사랑을 기꺼이 내팽개쳤던 터였다. 밤잠을 설치날도 그녀가 겪는 불행을 생각하며 이별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기막힌 위로였다.

미순이의 아이는 결국 죽었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없는데 병세마저 심각해졌던 탓이다. 아이를 잃고도 미순이는 쉴 겨를이 없었다. 그가 빌려 간 돈을 갚느라고 고생이 막심했다. 이를 악물고 버틴 미순이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고향을 떠나 내게로 왔다. 나는 그녀를 다시 친구로 대했다. 이제 주호는 우리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니 예전의 상태로 복구된 셈이다. 주호는 미순이와 나사이에 휘몰아쳤던 돌개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감성이 많이 지배한다. 감성은 세상에 대한 두근거림과 아름다움을 갖게 하고, 열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감성이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미순이는 딱딱한 거북의 등처럼 감정

에 흔들리지 않고, 각박하게 살았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미순이의 건조한 삶을 보며 연민을 느꼈다. 지금은 나도 생각들이 많이 변했다. 찢기고 피 흘리는 삶을 보며 살아온 탓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덧내는 경험들을 접할 때마다 감성이 삶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종종 깨닫는다. 비단 나이 탓만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나친 감정의 통제가 마음을사막처럼 메마르게 만든다고 느낄 때도 있으니까.

미순이는 생의 마지막을 내 곁에서 보냈다. 주호는 호적에서 가장이었지만 이미 잊혀져 버린 남편이었다.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다. 일이 끝나면 여기 들려줘."

폐암 말기에 죽음을 눈앞에 둔 미순이는 내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은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오로지 지루함을 가장하는 그녀의 음성은 지나치게 경쾌했다.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대하는 게 힘들고, 슬펐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귀찮지? 자주 불러서."

친구끼린데. 격식 차리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사이 아니던가."

“죽음이 목전인 사람의 요구는 신성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말을 삼켰다.

"내가 친구였나? 예전에는 누구보다도 널 싫다고 생각했는데.”"알아."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쩌면 쓰러뜨려야 할 적수이고, 넘어야 할 벽이라고 여겼는지도 몰라."

“무슨 전쟁 이야기냐?"

"크크, 정말이야. 너는 너무 거대해서 날 질식시켜“

"이제 보니 부창부수 맞네. 그래, 우린 서로가 대단한 연적이지.""농담도."

내 말에 대꾸하며 미순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