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식 운동 경기는 구한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기 종목은 야구(1904), 축구(1905), 유도(1906), 농구(1907), 정구(1908) 순으로 들어왔으며, 초기에는 서울의 몇몇 학교와 선교사가 거주하는 일부 지방 도시에서 행해질 뿐이었다.
정구(庭球)는 1908년 4월, 당시 탁지부(현 재무부) 관리들이 회동구락부를 조직하고, 이듬해 5월 여흥식(餘興式) 경기대회를 개최한 것이 효시로 알려진다.
이후 농상공부 직원들도 성계구락부를 만들고, 1911년 5월에는 왜성구락부, 한국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여러 팀이 경기를 치렀다.
이후 크고 작은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군산 개항(1899) 이후 선교사들이 구암동산에 개설한 선교스테이션에는 영명중학교(제일고 전신), 멜볼딘여학교(영광여고 전신),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전신) 등이 있었고, 야구와 축구가 가능한 운동장과 정구코트(정구장)도 갖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군산체육협회 정구부(정구단)를 비롯해 금강정구단, 경신구락부, 군산공립보통학교, 군산농업학교, 기독청년회, 군산금융조합 등에 정구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20년 8월 31일 군산기독청년회-군산농업학교 정구 대항전이 군산농업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날 경기는 두 팀이 백열전을 펼쳤으나 12시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점심 식사 후 재개되어 기독청년회가 승리하였다.
이후에도 개인(학생 포함) 및 직장팀 대항전 등 다양한 형식의 정구대회가 열린다. 전국 규모의 큰 대회도 개최된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산체육협회는 1921년 6월 26일 명치정(중앙로 1가) 심상고등소학교 운동장에서 정구대회(실업팀-은행팀)를 개최한다.
이날 오전 9시 수많은 관중의 박수와 환호 속에 개막된 경기는 접전을 펼친 결과 하오 5시 실업팀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돌아간다.
각 학교와 단체에 정구부가 조직되고, 지방 도시대항 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규모 정구대회에 출전하는 스타급 선수도 등장한다.
1927년 10월 11일 치 <동아일보>는 “전북 정구계에 패권(覇權)을 가진 군산 박대준(朴大俊)-신현주(申賢珠) 조(組)는 전북예선전(全北豫選戰)에 우승(優勝)되야 전라북도청의 파견(派遣)으로 금반(今般)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에 원정(遠征)케 되엿슴으로 내(來) 14일 야(夜) 군산발 10시 열차(列車)로 상경(上京) 하리라더라”라고 보도하였다.
박대준-신현주 조는 1927년 11월 23일 개벽사 군산지사가 주최한 제1회 개인정구대회도 패권을 차지한다.
두 선수는 이듬해(1928) 4월 군산금융조합 코트에서 열린 군산 개인정구대회에서도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군산체육협회 정구부가 주최한 이날 대회는 20여개 조가 참가하여 자웅을 겨뤘다.
선수들의 기발한 묘기에 관람객들은 흥미를 더하였다.
당시 신문은 박대준, 신현주 두 선수를 전 조선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정구 선수라고 소개하고 있다.
남녀유별 인습이 뿌리 깊었던 시기, 무명치마 차림에 댕기꼬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학생 정구 경기는 항상 초만원을 이뤘다.
그러나 남자들은 입장이 불허됐다. 주최 측은 남성 팬들의 시선을 의식해 주변에 차양을 쳤다.
호기심이 동한 청년들은 경기장 부근 나무 위로 올라가 관람하였고, 나뭇가지에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는 우스운 광경도 연출되었다.
[덧붙임]
1919년 2월 일제는 조선의 체육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본체육협회 조선 지부 형식으로 ‘조선체육협회’를 발족시킨다.
군산에도 일본인 중심의 체육단체(군산체육협회)가 만들어진다.
1921년 3월 당시 군산 부윤(宮館)은 시내 유지들과 회의를 열고 부(府) 협의회 의원, 학교조합 의원, 상업회의소 의원 및 은행지점장, 대택회의소 회두, 경찰서장, 판사, 검사, 우편국장, 세관 지서장, 군산일보 사장, 재향군인 분회장 등을 발기인으로 촉탁하였다.
조종안 기자는?
조종안 기자는 늘 발품을 판다.
현장 곳곳을 누비며 쓰는 그의 기사는 그래서 맛깔난다.
관념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현장에서 다양한 취재거리와 호흡하며 소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취재 열정과 집념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은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인쇄된 여러 권의 책이다.
이번에 '투데이 군산'에 새롭게 내용을 보완해 연재하는 <군산야구 100년사(2014)>를 비롯해 <군산항에 얽힌 이야기들(공저/2017)> <군산 해어화 100년(2018)> <금강, 그 물길 따라 100년(2018)>이 대표적이다.
그를 대변해주는 논문도 꽤 있다.
2013년에 군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한 [기록으로 보는 이영춘 박사-그가 겪은 고난 10가지]등은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라도 권번 문화예술에 대한 가치제고(2018)>라는 주제발표도 대표적인 그의 열정과 집념의 산물이다.
그는 2005년 인터넷신문 <플러스코리아>에서 처음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인터넷신문 <신문고 뉴스> 논설위원 및 편집위원을 지냈다.
지금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 중이다.
한국전쟁 발발 때 세상의 빛을 봤다는 그가 올해로 일흔의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취재 현장 곳곳에서 만나본 그는 여전히 젊다.
/'투데이 군산' 뉴스 디렉터